장인·흙·전통가마가 빚어내는 '숨쉬는 그릇'
'참살이·친환경' 바람타고 제2의 도약 꿈꿔
"불량품이 많이 나왔어요. 사람을 사서 (가마에) 불을 땠는데 조절이 잘 안됐어요. 불이 너무 세서 줄였더니 어떤 건 또 안 익었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면 외고산옹기마을. 입 부분이 주저앉거나 옆구리가 움푹 팬 옹기들이 영화요업 옆마당에 가득하다. 흙빛 검은빛 윤기가 흐르는 옹기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같은데 장인은 단호하다. 배영화(69·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장인은 "옹기엑스포기간에 너무 들떠있었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옹기세계에 입문한지 햇수로 50년. 눈을 감고도 옹기를 빚을 것만 같지만 그 역시 실수를 하나보다.
◆전국 최대 옹기집산지 = "전에는 서울 근교에도 옹기를 만드는 마을이 많았어요. 개발바람에 가마며 공방까지 다 팔아치운 거지."
배영화 장인은 "(외고산옹기마을은) 40여년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보존 된 것"이라며 "속 모르는 사람들은 '공기 좋은 데서 흙 만지는 일을 하니 얼마나 재미나겠느냐'고 한다"며 웃었다.
전국 어딜 가나 황토가 있는 곳엔 옹기가 있다. 외고산옹기마을은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국내 옹기 생산량 절반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 옹기집산지다. 1957년 경북 영덕에서 옹기점을 하던 허덕만씨가 교통이 편리한 이 지역에서 옹기점을 연 것이 그 시작이다.
"경주에서 부산 사이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이 여기 온양(溫陽)이에요. 추운 겨울에도 영하 5℃ 이하로는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요."
흙을 빚어 그늘에서 건조해야 하는 옹기의 특성상 잔잔한 바람이 불고 연중 온화한 날씨는 뛰어난 입지조건 중 하나라는 얘기다. 게다가 이 지역 흙은 굴방 즉 가마용 황토로는 최고다. 장인은 "대부분 가마가 4~5년이면 녹아버리는데 여기 흙은 불을 견디는 내화도(耐火度)가 높아 20~30년째 사용하는데도 끄떡없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을 비롯한 남부지방에 피난민이 몰린 터라 옹기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외고산에 자리잡은 옹기점만 10개, 도공만 200명이었다. 먹을거리 해결도 어려웠던 당시 옹기를 만들던 도공들은 상대적으로 넉넉했던 때문에 자연스레 옹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몰렸다.
"옛날에는 면 서기가 최고였잖아요? 1960년대만 해도 옹기대장(도공) 월급이 면 서기 3배는 됐어요. 시골에서 형제 많은 집은 입을 덜기 위해서 대장이 됐어요. 공방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줬거든. 우리 또래 옹기장이들은 대부분 그래."
◆열여덟에 견습공으로 입문 = 배영화 장인 역시 허덕만씨를 따라 고향인 경북 영덕을 등지고 온양에 정착했다.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채 공방에 들어가 처음에는 '뒷일(치닥거리)'을 도왔다. 견습공 딱지를 붙인 건 그가 열여덟 되던 1959년이다.
"하루는 스승이 부르더니 '너도 여기 계속 있을 거면 옹기를 만들어야지' 하시더라고요. 부지런하기만 하면 남 속이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이라고."
3년은 지나야 흙을 만질 줄 알고 10년은 배워야 쓸 만한 옹기를 빚는다 했다. 도공 생활은 견습도 쉽지 않았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고 가마에 쓸 나무를 하면서 일당도 없이 몇 해를 보내고 나서도 그가 만든 옹기는 그의 생산품이 아니었다. 전문 도공은 후배가 만든 것도 자기 이름으로 내놓기 일쑤였다.
"겨우 옹기를 빚나 했더니 이 양반(허덕만씨) 또 성질이 유별나. 말리려고 내놨더니 발로 홱 걷어차. 부족하다 이거지. 그래서 (옹기를 계속해야겠다) 결심을 하게 됐어요."
결혼을 하고 1년, 견습공으로 입문한지 꼭 10년만에 스승의 권유로 그도 공방을 냈다. 옹기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이며 미국에서도 수요가 있었다. 부유층의 정원 장식품이나 교포들의 장독대 김장항아리였다.
1990년만 해도 도공 10여명을 고용해 대량생산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빚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한 뒤부터는 오히려 수작업으로 소량 생산하는 전통옹기 제작법을 지키게 됐다. 때마침 군에서도 사양길에 접어든 옹기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전통을 강조하던 차였다.
"2000년에 공장을 정리하고 4년간 옹기마을회관에서 어린이 도예체험교실에서 가르쳤어요. 시간 날 때마다 수작업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가 판매를 했는데 재미가 쏠쏠해요.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수작업 제품을 사가요."
배씨는 "누군가 전통방식을 지켜야 마을에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1972년 스승이 타계한 뒤에도 외고산을 지키며 뫼통가마(칸이 나뉜 가마)에 불을 때온 덕도 봤다. 그는 요즘 천연유약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뿐 아니라 아파트 공간을 고려한 쌀독이며 돼지고기 훈제용 항아리, 장식용 '똥장군' 등 '요즘 사람' 취향을 고려한 옹기까지 만든다.
◆스승을 넘어설 제자 ="찾는 사람이 줄어든 게 제일 문제지요. 전에는 여름에 구워놓으면 가을에 김장 담그기 전에 청소하듯이 쓸어갔어요. 요즘은 김장독 사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 동네 옹기장이도 김치냉장고를 쓴다니까."
20㎏들이 쌀독을 빚어도 하루 15개가 고작이다. 매일 작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약을 바르기까지 3일, 다시 15~20일을 말려 가마에 넣고 굽는다. 그렇게 만들어 6만~7만원에 팔아도 소비자는 비싸다고 한다.
"지금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적어도 10년은 배워야하는데다 나이 들수록 기술이 좋아지지만 인건비는 줄어요. 힘이 없어서 많이 만들지를 못하거든."
배영화씨는 혀를 차지만 다행히 그에게는 제자가 있다. 스승이 그랬듯 그보다 한걸음 더 나가고 있는 허진규(44)씨다. 열 살부터 아버지를 졸라 중학교 진학 대신 도공의 길을 택한 허씨는 선반 위에 올려놓는 작은 장식품부터 정원을 비추는 옹기까지 디자인을 접목한 옹기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옛 방식 그대로를 고집하며.
"독특한 제품을 좋아하는 소비자가 많아요. 일손이 부족해서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 정도인데 없는 걸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옹기 양식이 100가지가 넘어요."
스승에서 제자로, 다시 그 제자의 제자로…. 장독대를 지키던 옹기는 다시 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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