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고문
.일본 가고시마 미야마(美山) 마을은 겉으로는 20년 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 가을 큐슈(九州) 여행길에 들른 심수관도원(沈壽官陶苑)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뒤편으로 널찍한 주차장이 생겨 새로 난 진입로가 낯설었다.
몰라보게 변한 것은 심씨 가마에서 두 집 떨어진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전 일본외상) 생가였다. 1990년 7월 취재여행 때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헐리고 없었다. 대신 그의 기념관이 들어섰다. 인근의 땅을 더 사들여 널찍한 공간에 아담한 건물을 짓고 사진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널찍한 기념관 앞뜰에는 시게노리 동상과 송덕비가 섰다. 14대 심수관이 주관하여 모금한 돈으로 제작한 것이다. 돌에 새겨진 건립기에 따르면, 938명이 돈을 낸 것으로 돼 있다. 지자체 예산으로 기념관이 건립되고, 일반인 모금으로 동상이 생긴다는 것은 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였다. 대문에 널빤지 빗장이 가로질러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전범의 집이라 해서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 외면을 했다고 한다. 1945년 전범재판(도쿄재판)에서 20년 금고형을 받았을 때는 돌팔매까지 날아들었다. 전범의 생가가 기념관이 된 변화의 동력은 그에 대한 인식의 변전이다. '태평양 전쟁 전범'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일반의 평가가 달라진 탓이다. 변화의 태동은 1960년대 일본이 고도성장의 과실을 맛보기 시작한 때였다.
가고시마의 시게노리 기념관
민족절멸의 위기에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 적기에 전쟁을 끝낸 덕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시기다. 그 무렵 그의 생가 뜰에 송덕비가 건립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를 다시 평가하는 움직임이 싹텄다. 태평양전쟁 개전과 패전 당시의 외무대신(장관)이었던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애쓴 업적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개전 당시 그는 전쟁을 피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다가 군부의 미움을 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다시 외무대신이 되어서는 종전공작에 온 정력을 쏟았다.
"하루라도 빨리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지 않으면 1억 일본민족은 절멸하고 맙니다."
미군의 본토상륙이 임박한 시점에도 결사항전을 고집한 군부의 위세에 맞서, 어전회의에서 포츠담선언 무조건 수락을 역설해 천황의 결심을 재촉한 사람이 그였다. 천황조차도 군부의 심기를 건드리기 꺼렸던 시대에, 전쟁광 도조 히데키에 맞서 그런 말을 한 것은 만용에 비유될 용기였다고 일본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미야마에서 태어난 도고는 4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도공 보호정책이 폐지된 뒤 그의 아버지가 도고라는 성을 사서 이름까지 일본인이 되었다.
도쿄대학 독문학과를 나와 외교관이 된 그는 '미야마의 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거짓말 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의 뒤를 이으라! 미야마의 어린이들"이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한다.
그의 조상은 정유재란 남원전투 때 사쓰마(薩摩)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간 80명 도공의 지도자 박평의(朴平意)였다. 시마즈는 도공 마을을 일본인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일본인과의 결혼마저 금했다. 조선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순혈주의 정책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 '사쓰마 야키(燒)'의 오늘을 만든 원동력이다. 시게노리도, 14대 심수관도, 100% 한국인 피를 이어받은 내력이기도 하다.
전쟁 참화 모르는가, 웬 힘자랑인가?
한다, 만다, 하던 연평도 사격훈련 뒤끝이 무사해지자, 23일 사상 최대 규모의 육·해·공 사격훈련이 실시되었다. 전쟁공포에 떨었던 국민의 어깨가 또 한번 움츠러들었다. 우리의 의지와 실력을 한번 보여주었으면 그만일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전쟁의 참화를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왜 자꾸 힘 자랑일까.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에서 보았듯이, 시간이 흐르면 역사의 평가는 제자리를 잡는다. 태평양전쟁 발발 70년을 맞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왜 도고 시게노리 같은 선각자가 없는지, 그것이 아쉽고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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