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각으로 지난 9일 오후 독일 베를린 리츠칼튼호텔. 이명박 대통령의 독일순방을 취재중인 기자들의 프레스센터다. 기자들은 "이번 순방은 예상대로 별 것이 없네"라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이때 예고에 없던 청와대측 전갈이 날아들었다. "몇 시간 뒤 메르켈 독일총리와 회담 뒤 이 대통령이 대북 관련 중대한 제의를 할 예정"이란 것이었다. 조간신문 마감에 임박한 시간이니 미리 지면을 잡아두란 설명도 덧붙였다. 기자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경험한 베를린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을 떠올렸다. 지난 3년간 꽉 막혔던 남북 경색국면이 풀릴 것이란 직감도 보태졌다.
그러나 기자들의 기대는 잠시후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의 사전브리핑 뒤 '역시나'로 바뀌었다. 중대 대북제안이란 내년 3월 서울에서 열릴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딸렸다. 북한이 비핵화를 합의해야 하며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을 대미 체제수호의 마지막 보루로 여기는 북한으로선 '발가벗고' 협상에 임하라는 주문이다. 북한이 받기 힘든 조건이다. 천안함은 모략이고 연평도는 유감을 표명했다는게 북한 입장이니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더구나 김정일은 다자정상회의에 참석한 일이 없다. 그것도 '핵'을 주제로 50여국 정상이 모이는 회의에 초청받은 사실 자체가 북한 입장으로선 반가울 일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 당시 미국은 물론 북한에도 사전통보했고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부산에서 APEC(아시아태평양정상회의)을 개최할 때 김정일 초청여부를 검토했다가 하지 않았다.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이번 제안은 생뚱맞다. 일각에서는 '대내외 전시용 제안'이란 혹평까지 나온다. 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원조를 하더라도 원조 받는 국가의 입장을 헤아려 두 손으로 드려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했다. 피를 나눈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문제에 아프리카 오지나라에 쏟는 정성보다 못해서야 되겠는지 다시 생각해볼 때다.
성홍식 기자 hss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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