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순방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9일 베를린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대하여 국제사회와 확고히 합의한다면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다. 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는 말도 있다. 대통령의 이번 독일회견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발표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독일에서 남북문제와 관련해 모종의 중대한 발표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취임 후 일관되게 대북한 압박정책을 유지해왔던 이명박정부가 임기말을 앞두고 대북정책에서 무엇인가 돌파구를 마련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일반적 기대감이 작용한 것이겠으나 정부 주변에서도 이러저런 경로를 통해 무엇인가 내놓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한독 정상회담에 앞서 교민 간담회에서도 "통일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 이런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독일은 한국과 함께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됐다가 먼저 통일을 이룩한 나라이고 수도 베를린은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이곳에서 통일이나 핵 등 남북문제와 관련해 중대한 선언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또 2000년 3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도 이곳 자유대학을 방문해 남북대화를 역설하며 대북 경제지원을 약속했고 그해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전례도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입으로 하는 선언이 아니라 비핵화 실현
그러나 그런 기대가 다 무너지고 말았다. 우선 "북한이 국제사회와 비핵화에 대해 확고히 합의한다면"이란 전제부터가 지나치게 공허해 보인다. 북한은 1992년 1월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에서 비핵화를 문서로 확인했고 2005년 6자회담 제4차 회의에서도 이른바 '9·19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은 모든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것을 약속했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국제적 확인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나 북한은 그런 약속들을 모구 파기하고 말았다. 지금도 북한측은 비핵화원칙을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약속이나 원칙적인 선언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비핵화를 실현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나 남북문제는 무엇인가 획기적인 내용이 없이는 진전이 불가능해 보인다.
둘째로는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올 것이란 가정이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허황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다음 남북정상회담은 남측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경호문제에 대한 불안은 거의 공포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김 위원장이 서울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50여 국가정상이 참석하는 자리에 나타난다면 뭇매(?)를 맞을 게 확실한데, 그런 회의에 참석하리란 상상은 참으로 가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북문제 돌파구 마련해야
이 부분과 관련해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한 안보관련 고위 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면 북한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묵인 내지 용인의 효과가 있을 것이며 북한이 '정상국가'로 인정받는 의미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명박정부 외교안보라인 당국자들의 상상력이란 가히 소설가 수준이다.
예의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 전제도 달려 있는데 두 사건은 모두 지난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대북 압박정책은 정부 출범부터 시작된 것이다. 남북문제가 두 사건 때문에 암초에 부닥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연평도 사건같은 군사적 문제는 군사회담이나 다른 루트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을 남북문제나 핵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남북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갈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 대통령이 남북문제와 관련해 해온 말과 실제 내놓는 정책 간에는 언제나 큰 괴리가 있어왔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대규모 남북협력기반 조성같은 획기적인 정책전환이 없다면 이명박정부는 한반도를 냉전체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는 역사적 평가를 결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춘웅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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