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
등록된 카드 모집원은 5만여 명이다. 생계를 걸머진 5만 명이 카드고객을 모집하기 위해 전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경쟁 모습을 생각해보라.
거래하는 은행 여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이번에 카드 하나를 새로 보낼 테니 써 보세요. 교통카드로도 겸용되고 포인트도 있고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아니, 그 은행에서 발급해준 카드가 있는데 또 보내준다고요?"
"선생님. 연회비도 면제해주니 이번 한번만 써주세요. 그럼 우편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말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 전화가 꺼졌다. 그리고 며칠 후 신용 카드가 배달되었다. 그 은행에서 발행한 카드를 쓰고 있는데 다시 꼭 같은 외국 브랜드의 카드가 하나 생긴 것이다.
그 전에는 다른 은행에서 발급해준 카드가 휘어서 쓰기 불편하다고 호소하자 "그럼, 다른 걸로 써보세요."라고 말하면서 그 은행에서도 다른 카드를 발급해줬다.
이렇게 해서 은행에서 발급해준 카드가 4개, 백화점에서 발급한 카드가 2개, 재벌 카드회사가 발급해준 카드가 1개 등 모두 7개의 카드를 갖게 되었다. 제휴한 외국 카드회사 기준으로 보면 비자카드가 4개, 마스터카드가 2개, 아멕스가 1개나 된다.
소득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카드를 7개나 갖게 되니 보통 압박감을 받는 게 아니다. 한 두 개만 소지하고 나머지는 거의 쓰지 않게 된다.
그러나 월말이 되면 카드결제를 알리는 우편이 7통이나 배달되니 그걸 열어 확인하는 일도 귀찮고 비닐창이 달린 봉투를 일일이 처리하는 것도 고달프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시간낭비, 사회적으로는 자원낭비다. 딱 잘라 거부했으면 이렇게 카드가 많아지지 않았을 것이니, 스스로 불편을 자초한 셈이다.
소득도 많지 않은데 카드는 7개
내가 은행과 한 푼도 거래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은행원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리도 만무하니, 내 주머니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드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놓고 은행에 갔을 때 직원에게 불만을 털어놨다. 다른 장점이 있는 카드를 내줄 터이면 기왕의 카드를 바꿔주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카드를 추가로 내주려 하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 직원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요즘 경쟁적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우리 은행원들의 입장을 좀 이해해 주세요"라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2002년 카드대란까지 겪었던 우리나라가 다시 카드가 흘러넘치는 사회가 되었다. 한국은행 통계에 의하면 3월 기준 발급된 신용카드는 총 1억1950만장이라고 한다. 국민 한 사람이 평균 2개 이상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아니 실제로 카드를 쓸 수 있는 경제활동 연령층을 고려한다면 서너 장을 소지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놀라운 사실은 한 달에 신용카드가 100만 장씩 증가한다는 통계다. 과연 이렇게 대량으로 쏟아지는 카드가 누구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신용카드 홍수의 원인이 은행원들의 권유뿐이 아니란다. 카드사들이 경쟁적으로 카드 모집원을 풀어 고객을 늘리고 있는 것도 문제다. 현재 등록된 카드 모집원은 5만여 명이다. 생계를 걸머진 5만 명이 카드고객을 모집하기 위해 전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경쟁 모습을 생각해보라. 편법을 비롯한 온갖 수단과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연회비를 받지 않는가 하면, 카드를 발급받으면 현금이나 선물을 주고, 신용불량자에게 카드를 내주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카드 발급에 가장 달콤한 조건은 뭐니뭐니해도 무이자 할부와 카드론이다. 카드 할부 결제금액은 눈덩이처럼 늘어나서 76조7000억원에 이르러 2002년의 카드대란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카드론은 은행돈을 못 빌리는 저신용자에게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소득수준 하위 20% 가구의 카드론의 평균액은 1700만원에 이르고 있어 8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고 한다.
카드는 돈의 소중함을 잊게 하는 마약
우리나라는 이제 자가용이 없으면 허전해서 살 수 없고, 카드가 없으면 현대인의 감각을 상실해버린 것처럼 느끼는 사회가 되었다. 자동차가 에너지 파동의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듯이, 카드는 돈의 소중함을 잠시 잊게 하는 마약과 같다.
카드는 현금을 지참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참 편리한 존재다. 우리나라의 풍요로운 오늘을 대변한다. 그러나 편리함 뒤에 숨은 독소가 개인이나 사회를 언제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넘치면 흘러나오거나 폭발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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