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언론인·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지난 29일과 30일 실시된 이태리 지방(도시)선거 결선투표에서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우파 자유인민당(PDL)이 참패했다. 좌파가 이태리의 경제 수도라는 밀라노를 비롯해서 나폴리, 칼리아, 트리에스트 등 주요도시들을 장악했다. 밀라노는 베를루스코니가 출생하고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장한 본고장이다. 18년간 우파가 장악해 온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아성이다. 밀라노 시장 선거에서 레티지아 모라티 현 시장의 재선 전망이 불확실해 보이자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재선을 위해 선거전에 직접 뛰어들어 모든 수단을 다해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모라티는 낙선하고 좌파 환경과 자유당 후보 줄리오 피사피아가 새 시장에 당선됐다.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밀라노 시민의 심판이었다. 단순한 여당 시장 후보의 패배에 그치지 않고 베를루스코니 정권에 대한 심판이라는 해석이 많다. 유럽 언론들이 이번 선거 결과를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국의 4·27보선과 아주 유사한 성격의 선거였다. 벌써부터 베를루스코니 이후의 이태리 정국 전망이 화제로 대두되고 있다.
온갖 부정 사건으로 지탄받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섹스 스캔들로 다른 유럽 국가 같았으면 이미 정계에서 축출됐을 법한데도 오뚜기처럼 정권을 유지해 온 베를루스코니가 그의 본고장에서 시장 자리 하나를 지키지 못한 것은 그의 신화도 약효가 다 해가고 있다는 징조다. 르몽드도 분석 기사에서 이번 선거 패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의 막강한 미디어 권력이 그 한계를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사실 베를루스코니가 전 세계인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2008년의 총선, 2009년의 유럽의회 선거, 작년의 지방선거에서 내리 승리하는 불가사의한 "기적"을 연출한 데 대해서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보았다.
베를루스코니 미디어 권력의 한계
좌파의 분열과 베를루스코니가 장악하고 있는 미디어 권력의 힘이었다. 그런데 그 미디어의 신통력 역시 효력이 떨어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베를루스코니는 부동산으로 번 돈으로 텔레비전 방송망을 구축해서. 텔레비전을 사업과 정치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현제 3개의 텔레비전 채널과 세계적인 몬다도리 출판그룹, 12개의 신문을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 총리로서 공영방송 라이(RAI)를 관장하고 있다. 이태리 텔레비전 채널의 거의 90%을 장악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모라티 시장의 당선이 어려워 보이자 베를루스코니는 모라티를 지원하는 자기 선거 비데오를 제작해서 공영 라이방송과 자기 소유의 TV 레테4 뉴스 시간에 연거푸 방송하게 했다.
선거법에 위반되는 행동이었다. 그의 방송 이용시간은 급증하는데 야당 후보의 방송 이용시간은 늘려주지 않아 TV 이용시간에 불균형이 생겼기 때문이다. 통신위원회(Agcom)는 법을 위반해서 베를루스코니의 비데오를 방영한 공영 라이1 채널과 상업 TV 레테4에 80만 유로(약 12억원)의 벌과금을 부과했다.
이 결정에 대해서 레테4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정이라며 행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반발했다. 라이 역시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의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마치 미국의 폭스 방송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미명 아래 민주당을 편파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을 방송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논리다. 앞으로 우리 종편이 이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베를루스코니 TV 과다 이용에 벌과금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하나의 특징은 좌파의 승리가 정당의 승리라기보다는 시민사회활동 경험이 있는 새로운 인물들을 많이 등장시킨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태리 정치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런 좌파의 세대교체가 정치와 기업을 동일시하고 정치를 부패시킨 베를루스코니 같은 부패 세대의 퇴장과 동시에 일어난다면 이태리의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아주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베를루스코니는 선거 때문에 미룬 탈세·횡령·미성년 성행위 혐의 등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출정했다. 불법행위로 집권기간 내내 이렇게 재판을 받는 총리가 어떻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부패 정치인을 뽑아 국회에 보낸 유권자가 그 책임을 분담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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