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물난리가 난 27일 낮 지하철로 서울 마포구 망원동을 통과하면서, 여러 상념에 젖었다. 1972년 8·19 수해 때 그곳을 취재하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사건기자 초년병 시절, 어디가 한강인지 어디가 마을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침수현장이 언제나 제 모습을 되찾을까 싶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는 산사태, 축대붕괴, 침수 같은 수재현장이 너무 많아 일일이 현장취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웬만한 사고는 발생일시와 피해상황만 파악하여 간단히 보도하고 말았다. 평창동 산사태 현장에서는 수십 명이 희생되어 수많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날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다른 사고가 발생하면 장대비를 맞으며 달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피해상황을 파악하느라고 들짐승처럼 뛰어다녔다.
그 때의 피해상이 궁금해서 기록을 찾아보았다. 사망·실종 301명, 부상 180명, 이재민 23만 938명, 침수지역 16곳 142개동. 지금 되돌아보아도 믿어지지 않는다. 산사태로 죽은 사람만 176명, 익사 34명, 축대붕괴로 26명, 압사 22명, 감전사 등으로 19명. 침수피해 주택이 3만 9552동이었다. 침수가 그토록 광범위했던 것은 한강제방이 터진 탓이었다. 막 건설되기 시작한 강변도로가 너무 낮았다. 아직 개발 사업이 불붙기 전의 서울은 그런 도시였다. 비와 눈과 바람 같은 자연재해에 너무 취약했다.
자연재해에 취약했던 서울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지금 그 때를 돌아보니, 서울은 참 안전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난리의 인명피해는 중부지방을 포함해도 50명이 안 된다. 한강제방과 지천 둑이 터져 서울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는 일도 없었다. 산사태가 나긴 했어도 그 때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서울의 심장인 광화문 거리, 번화가 1번지 강남역 네거리, 부자동네의 상징인 대치동 네거리가 물에 잠겼지만 비가 그친 뒤 곧 원상회복이 되었다.
강수량을 비교해 보았더니 이번이 훨씬 많았다. 8·19 수해 때 이틀 동안 서울에 내린 비는 452.4mm였다. 1920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이 내린 비라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틀 동안 서울에 내린 비는 28일 오후 4시 현재 534mm라 한다. 26일 오후 4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이틀 동안 평년 강우량의 3분의 1이 넘게 쏟아진 셈이다. 경기 북부 동두천은 하루 강수량이 450mm를 기록했다. 이틀 동안 700mm 넘는 곳도 많다.
훨씬 많은 비가 내렸는데도 피해가 적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수방시설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8·19 수해 때 가동된 배수펌프장은 서울시내에 단 일곱 군데뿐이었다. 한 펌프장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펌프기가 서넛뿐이었다. 그런 원시적인 시설로 내수(內水)를 퍼내려고 했으니 쪽박으로 강물을 퍼내려는 꼴이 아니었던가. 재난방지 시설 예산이 개발속도를 따라잡지 못 한 개발지상주의 시대 코미디 같은 한 풍경이다.
내가 사는 곳은 상습 수해지로 유명한 한강하류 남쪽 지역이다. 한강의 여러 지류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안양천이 본류로 흘러드는 이곳은 상습 수해지라는 오명 때문에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개발이 늦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무 피해가 없었다. 20년이 넘도록 수해방지 시설을 꾸준히 개선해 온 덕분이다. 하수관로는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배수펌프장 시설도 정기적으로 강화되어, 아무리 유수지에 빗물이 많이 고여도 순식간에 퍼낸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이웃 일본을 보면 우리는 앞으로 한참 더 애써야 한다. 한 때 한반도에 상륙할지 모른다는 예보 때문에 우리를 긴장시켰던 태풍 '망온'은 20일 일본 시코쿠(四國) 섬에 상륙했다가 태평양으로 빠져나갔다. 사람이 날아갈 정도의 강풍과 함께 하루에 최고 850mm의 비를 뿌렸다. 이틀 동안 강수량은 무려 1200mm가 넘은 곳도 있는데, 피해는 사망 2명, 정전 9000세대에 그쳤다. 우리가 왜 더 힘써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수치들이다.
'태풍에도 안전한 일본' 배워야
일본도 50년 전에는 태풍이 한 번 지나가면 천명도 넘는 인명피해가 났다. 특히 '태풍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남서지역은 한 해에도 몇 번씩 그런 난리를 치렀다. 그곳은 지금 세계에서 태풍에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다. 더 이상 일본에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듯이 선망의 눈길을 거둔 한국이지만, 그것만은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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