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님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영변의 향나무가 안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와룡 두루 진성 이씨 종택에 가면 특이한 모양을 한 향나무 한 그루가 있어 눈길을 끈다. 안두막한 높이에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펑퍼짐하게 자라고 있는 이 향나무는 보기에도 멋스럽다.
소백산에서 예고계를 넘어 금학산을 지나 수창산을 거쳐 와룡에 이르러 오룡봉이 우뚝 자리를 잡는다.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두루 종택은 소백산에서 줄기차게 이어온 뒷산도 수려하거니와 앞에 보이는 안산도 반달 모양을 하고 있어 600년을 지켜온 종가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반달은 희망과 성장 발전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보름달이 꽉 찬 달이어서 기울어짐을 의미한다면 반달은 새로 채워지는 달로 생명의 약동과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뚝향나무는 바로 이 반달 모양의 안산을 바라보며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종가에 딸린 경류정 마루에 앉아 있으면 한없이 넓게 퍼져나가는 향나무와 새색시의 입술 같은 반달의 안산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향나무의 푸른 기상과 안산의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집주인의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전설 속의 이정 장군
이 향나무는 퇴계 선생의 증조부이신 이정(李禎)공이 영변 약산에서 가져다 심었다. 이정 공의 용맹은 대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 제비원미륵상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예전에는 주위 바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비를 맞지 않게 했다. 그 높이가 돌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수십 길이나 되어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이었다. 이정 공은 이곳을 자신의 무공 수련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위의 돌과 돌을 옮겨다니기도 하고 주위의 지형을 이용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석불 지붕에 올라가 공중 회전하여 뛰어 내리는 훈련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공이 최윤덕 장군-세종 때 여진족을 정벌한 공으로 우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다-을 따라 건주위(建州衛)에 종군했을 때의 일이다. 건주위는 조선 태종 때 여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건주본위, 건주우위, 건주좌위 등으로 나뉘었으며, 세종 때 최덕원, 이장(李藏)이 2차에 걸쳐 정벌하고 세조와 성종 때 각각 2차에 걸쳐 다시 정벌하였으나 완전히 소탕되지는 못했다. 이 건주위는 여진이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의 세력이 약한 틈을 타서 세력을 신장하여 청을 건설했던 험준한 산골이어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공이 이곳에 부임했을 때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호랑이는 인근 사람은 물론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니 백성들이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그래서 최덕원이 유능한 포수를 모집하여 호랑이를 잡으려고 할 때 이정 공이 자청하였다.
“장차 오랑캐를 치려고 하는데 내가 미리 이 호랑이를 잡아 나의 용기와 근력을 시험해 보겠다”하고 즉시 말을 달려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호랑이는 이 공을 보자 으르렁대면서 말 뒷덜미를 박차고 뛰어 오르며 공격해 왔다. 공은 날쌔게 말머리를 돌려 호랑이를 활로 쏘아 나뒹굴게 하였으니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탄복을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정(李禎) 공은 정주판관을 지낼 때 평안북도 약산 산성 축조를 한 공로가 있었다. 약산성은 평안북도 영변 서쪽 12km 지점에 있는데, 관아의 남쪽에 있는 운주루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그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이다. 이 약산은 사방이 높은 암석으로 깎아지른 듯이 높아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성으로 의주 삭주 강계 등 인근의 군사를 모으기에 가장 좋으며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한 지역이다. 이정 공은 1429년 약산성을 무사히 축조하고 돌아올 때에 다른 재물은 다 버리고 향나무 세 그루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두루종택 앞에 심었고, 또 한 그루는 이정 공의 셋째 아들 판서공 계양이 온혜에서 터를 잡아 집을 지을 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그루는 화분에 담아 기르며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며 곁에 두고 길렀었다. 그러다가 선산부사 시절 박근손을 사위로 삼게 되었다. 박근손(朴謹孫)은 선산(해평) 박씨로 육 자매(남백경, 류봉수,전보문, 이주, 박근손, 권종) 중 넷째 사위이다. 그 후 선산 부사를 마치고 돌아 올 때에 사위가 너무 사랑스러웠던지 화분의 향나무를 사위에게 주었다고 한다.
자랑할 것은 굳은 지조
세 그루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경류정 정자 앞에 서 있는 뚝향나무 한 그루뿐이다. 온혜 노송정 종택에 있던 것은 노송이 되어 여러 번의 전란과 관리의 잘못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사위 박근손에게 준 한 그루도 잘 자라다가 임진왜란 때 전란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경류정에 있는 향나무는 600년의 세월을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공의 14대손 이만인(李晩寅)은 그가 쓴 경류정 노송기(慶流亭 老松記-松은 향나무를 가리킴)에서 “향나무는 차가운 계절에도 지조가 있는 나무이다. 지금 바야흐로 차가운 계절(일제시대)이 되어 곤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절개를 지키기에 더욱 힘써서 조선의 근본 뜻을 더럽히지 말아야만 이 향나무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더불어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적고 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만인의 다짐처럼 뚝향나무의 푸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한 많은 문인과 구한말의 의병과 일제치하의 독립투사들의 기개도 이러한 향나무의 숨은 뜻이 담겨있었음일 것이다.
가문의 자랑이 높은 벼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굳은 지조를 지켰던 의병과 독립투사가 많았던 것이 자랑이라는 이 집안 어른들의 말은 올곧은 양반 정신이 이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었던 옛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저 물질에만 의존하는 오늘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안동문화 지킴이 <사람과 문화=""> 11호에서 새로 정리하였음.
김호태 경일고 교사사람과>
소백산에서 예고계를 넘어 금학산을 지나 수창산을 거쳐 와룡에 이르러 오룡봉이 우뚝 자리를 잡는다.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두루 종택은 소백산에서 줄기차게 이어온 뒷산도 수려하거니와 앞에 보이는 안산도 반달 모양을 하고 있어 600년을 지켜온 종가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반달은 희망과 성장 발전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보름달이 꽉 찬 달이어서 기울어짐을 의미한다면 반달은 새로 채워지는 달로 생명의 약동과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뚝향나무는 바로 이 반달 모양의 안산을 바라보며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종가에 딸린 경류정 마루에 앉아 있으면 한없이 넓게 퍼져나가는 향나무와 새색시의 입술 같은 반달의 안산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향나무의 푸른 기상과 안산의 부드러움이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집주인의 깊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전설 속의 이정 장군
이 향나무는 퇴계 선생의 증조부이신 이정(李禎)공이 영변 약산에서 가져다 심었다. 이정 공의 용맹은 대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 제비원미륵상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예전에는 주위 바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비를 맞지 않게 했다. 그 높이가 돌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수십 길이나 되어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이었다. 이정 공은 이곳을 자신의 무공 수련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위의 돌과 돌을 옮겨다니기도 하고 주위의 지형을 이용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석불 지붕에 올라가 공중 회전하여 뛰어 내리는 훈련은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공이 최윤덕 장군-세종 때 여진족을 정벌한 공으로 우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다-을 따라 건주위(建州衛)에 종군했을 때의 일이다. 건주위는 조선 태종 때 여진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건주본위, 건주우위, 건주좌위 등으로 나뉘었으며, 세종 때 최덕원, 이장(李藏)이 2차에 걸쳐 정벌하고 세조와 성종 때 각각 2차에 걸쳐 다시 정벌하였으나 완전히 소탕되지는 못했다. 이 건주위는 여진이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의 세력이 약한 틈을 타서 세력을 신장하여 청을 건설했던 험준한 산골이어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공이 이곳에 부임했을 때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호랑이는 인근 사람은 물론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니 백성들이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그래서 최덕원이 유능한 포수를 모집하여 호랑이를 잡으려고 할 때 이정 공이 자청하였다.
“장차 오랑캐를 치려고 하는데 내가 미리 이 호랑이를 잡아 나의 용기와 근력을 시험해 보겠다”하고 즉시 말을 달려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호랑이는 이 공을 보자 으르렁대면서 말 뒷덜미를 박차고 뛰어 오르며 공격해 왔다. 공은 날쌔게 말머리를 돌려 호랑이를 활로 쏘아 나뒹굴게 하였으니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탄복을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정(李禎) 공은 정주판관을 지낼 때 평안북도 약산 산성 축조를 한 공로가 있었다. 약산성은 평안북도 영변 서쪽 12km 지점에 있는데, 관아의 남쪽에 있는 운주루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로 그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이다. 이 약산은 사방이 높은 암석으로 깎아지른 듯이 높아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성으로 의주 삭주 강계 등 인근의 군사를 모으기에 가장 좋으며 땅이 기름져 오곡이 풍성한 지역이다. 이정 공은 1429년 약산성을 무사히 축조하고 돌아올 때에 다른 재물은 다 버리고 향나무 세 그루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세 그루 중 한 그루는 두루종택 앞에 심었고, 또 한 그루는 이정 공의 셋째 아들 판서공 계양이 온혜에서 터를 잡아 집을 지을 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그루는 화분에 담아 기르며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며 곁에 두고 길렀었다. 그러다가 선산부사 시절 박근손을 사위로 삼게 되었다. 박근손(朴謹孫)은 선산(해평) 박씨로 육 자매(남백경, 류봉수,전보문, 이주, 박근손, 권종) 중 넷째 사위이다. 그 후 선산 부사를 마치고 돌아 올 때에 사위가 너무 사랑스러웠던지 화분의 향나무를 사위에게 주었다고 한다.
자랑할 것은 굳은 지조
세 그루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경류정 정자 앞에 서 있는 뚝향나무 한 그루뿐이다. 온혜 노송정 종택에 있던 것은 노송이 되어 여러 번의 전란과 관리의 잘못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사위 박근손에게 준 한 그루도 잘 자라다가 임진왜란 때 전란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경류정에 있는 향나무는 600년의 세월을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공의 14대손 이만인(李晩寅)은 그가 쓴 경류정 노송기(慶流亭 老松記-松은 향나무를 가리킴)에서 “향나무는 차가운 계절에도 지조가 있는 나무이다. 지금 바야흐로 차가운 계절(일제시대)이 되어 곤궁하더라도 의리를 잃지 말고 절개를 지키기에 더욱 힘써서 조선의 근본 뜻을 더럽히지 말아야만 이 향나무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더불어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적고 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만인의 다짐처럼 뚝향나무의 푸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한 많은 문인과 구한말의 의병과 일제치하의 독립투사들의 기개도 이러한 향나무의 숨은 뜻이 담겨있었음일 것이다.
가문의 자랑이 높은 벼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굳은 지조를 지켰던 의병과 독립투사가 많았던 것이 자랑이라는 이 집안 어른들의 말은 올곧은 양반 정신이 이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 한 그루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었던 옛 어른들의 모습에서 그저 물질에만 의존하는 오늘의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안동문화 지킴이 <사람과 문화=""> 11호에서 새로 정리하였음.
김호태 경일고 교사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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