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북 아프리카의 리비아를 42년간 철권통치 해온 무아마르 카다피가 20일 반정부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지난 1월 튀니지의 자스민혁명, 2월의 카이로혁명에 이어 세번째로 성공한 아랍혁명의 결실이다. 카다피 사망으로 그 동안 동력을 잃었던 아랍의 민주화운동이 다시 힘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월 15일 수도 트리폴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을 때 군용기를 동원해서 비무장 민간 시위대를 학살한 카다피의 행동이 그의 종말을 재촉한 도화선이 됐다. 그 때까지는 카다피의 통치력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민간 시위대를 진압하 는데 전투기를 동원한 비인도적인 만행은 세계적인 공분을 촉발했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리비아 인민의 분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리비아에 경제적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은 반카다피 시위와 자스민혁명의 바람을 이용해서 카다피 제거를 노리고 유엔의 군사제재를 얻어내는 데 앞장섰다. 카다피의 운명은 이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카다피의 반세기에 가까운 장기독재와 철저한 반대세력 제거 정책으로 정권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조직이나 군사조직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토의 가공할 공습에도 카다피 정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때 반군은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점인 벵가지의 함락이 우려되는 상황까지 몰렸다. 그러나 내년 재선을 노리는 프랑스의 사르코지나 미국의 오바마의 입장에서 리비아 개입의 실패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반군 쪽에 군사 전문가를 파견하고 무기를 제공하고 반군을 훈련시켰다.
나토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마침내 8월 중순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 점령에 성공했다. 전세는 이 때 결판났다. 카다피는 고향 시르테로 달아나 마지막 항전을 벌이게 됐다.
부족간 대립 해소가 향후 최대과제
정권과 자기 가족의 운명을 건 항전이었기 때문에 그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생각보다 긴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운명은 나토군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9월 1일 파리에서 열린 '리비아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국제회의는 카다피 정권의 종말을 국제사회에 선언하는 회의였다. 카다피가 이 때 나토의 협상을 받아들였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다피는 군인이고 42년간 고개를 숙여본 일이 없는 독재자였다. 한때 이집트 나세르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서방세계를 상대로 큰소리를 치고 아프리카 분쟁의 중재 역할을 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항전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피난처인 하수구에서 반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카다피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느낌이다.
이제 카다피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독재는 많은 숙제를 리비아 인민에게 남겨 놓았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부족국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리비아다. 카다피가 1인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의 대립을 이용한 유산을 정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 간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으면 나라가 둘로 분열될 위험도 없지 않다. 국제적으로는 리비아의 석유를 노리는 강대국 간의 경쟁, 전후 복구에서 파생될 이권을 노리는 참전국들의 경쟁도 예상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도박판에 서는 판돈 많이 낸 사람이 많이 차지한다는 원칙에 묵시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카다피의 퇴장이 아랍의 민주화에 미칠 영향이지 않나 생각된다.
23일 튀니지에서는 독재자 벤 알리가 물러난 이후 새 민주정권의 틀을 짤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자스민 혁명으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카이로에서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몰아 낸 이후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카다피의 저항 때문이었다.
아랍 민주화 전망 한층 더 밝아져
그런데 이제 카다피가 제거됐다. 큰 장애물이 제거된 셈이다. 대신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아랍의 민주화 바람을 막고 있다. 그 동안 알 아사드는 카다피가 나토의 압력을 막아내는 데 고무돼 서방의 압력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카다피의 방벽이 없어졌으니 아사드는 서방의 압력을 직접 막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리비아가 평정됐으니 서방도 아사드의 민주화시위 탄압 저지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아랍의 봄, 민주화 전망이 그만큼 밝아졌다고 본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북 아프리카의 리비아를 42년간 철권통치 해온 무아마르 카다피가 20일 반정부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지난 1월 튀니지의 자스민혁명, 2월의 카이로혁명에 이어 세번째로 성공한 아랍혁명의 결실이다. 카다피 사망으로 그 동안 동력을 잃었던 아랍의 민주화운동이 다시 힘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월 15일 수도 트리폴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을 때 군용기를 동원해서 비무장 민간 시위대를 학살한 카다피의 행동이 그의 종말을 재촉한 도화선이 됐다. 그 때까지는 카다피의 통치력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민간 시위대를 진압하 는데 전투기를 동원한 비인도적인 만행은 세계적인 공분을 촉발했고 오랫동안 억눌렸던 리비아 인민의 분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리비아에 경제적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은 반카다피 시위와 자스민혁명의 바람을 이용해서 카다피 제거를 노리고 유엔의 군사제재를 얻어내는 데 앞장섰다. 카다피의 운명은 이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카다피의 반세기에 가까운 장기독재와 철저한 반대세력 제거 정책으로 정권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조직이나 군사조직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토의 가공할 공습에도 카다피 정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때 반군은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점인 벵가지의 함락이 우려되는 상황까지 몰렸다. 그러나 내년 재선을 노리는 프랑스의 사르코지나 미국의 오바마의 입장에서 리비아 개입의 실패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반군 쪽에 군사 전문가를 파견하고 무기를 제공하고 반군을 훈련시켰다.
나토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마침내 8월 중순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 점령에 성공했다. 전세는 이 때 결판났다. 카다피는 고향 시르테로 달아나 마지막 항전을 벌이게 됐다.
부족간 대립 해소가 향후 최대과제
정권과 자기 가족의 운명을 건 항전이었기 때문에 그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생각보다 긴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운명은 나토군의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9월 1일 파리에서 열린 '리비아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국제회의는 카다피 정권의 종말을 국제사회에 선언하는 회의였다. 카다피가 이 때 나토의 협상을 받아들였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다피는 군인이고 42년간 고개를 숙여본 일이 없는 독재자였다. 한때 이집트 나세르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서방세계를 상대로 큰소리를 치고 아프리카 분쟁의 중재 역할을 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항전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피난처인 하수구에서 반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카다피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느낌이다.
이제 카다피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독재는 많은 숙제를 리비아 인민에게 남겨 놓았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부족국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리비아다. 카다피가 1인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의 대립을 이용한 유산을 정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부족 간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으면 나라가 둘로 분열될 위험도 없지 않다. 국제적으로는 리비아의 석유를 노리는 강대국 간의 경쟁, 전후 복구에서 파생될 이권을 노리는 참전국들의 경쟁도 예상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도박판에 서는 판돈 많이 낸 사람이 많이 차지한다는 원칙에 묵시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카다피의 퇴장이 아랍의 민주화에 미칠 영향이지 않나 생각된다.
23일 튀니지에서는 독재자 벤 알리가 물러난 이후 새 민주정권의 틀을 짤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된다. 그러나 자스민 혁명으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카이로에서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몰아 낸 이후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카다피의 저항 때문이었다.
아랍 민주화 전망 한층 더 밝아져
그런데 이제 카다피가 제거됐다. 큰 장애물이 제거된 셈이다. 대신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아랍의 민주화 바람을 막고 있다. 그 동안 알 아사드는 카다피가 나토의 압력을 막아내는 데 고무돼 서방의 압력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카다피의 방벽이 없어졌으니 아사드는 서방의 압력을 직접 막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리비아가 평정됐으니 서방도 아사드의 민주화시위 탄압 저지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아랍의 봄, 민주화 전망이 그만큼 밝아졌다고 본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