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칼럼니스트
대공황시대의 미국 경제를 포커 판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다. 연준의 의장으로 미국 경제의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매리너 에클스였다.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 즉 여타의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신용이 바닥나자 게임은 중단되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 막장의 포커 판을 닮은 것 같다. 다만 위기감은 게임의 패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전염되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의 주제는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거대한 전환:신모델의 형성'이었다.
이 포럼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지금 당장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비가 절실하지만 단순한 시스템 정비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위기의 근본원인 찾기다. 흔히 거론되는 원죄는 과소비다. 거기에서 채무 누적과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고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 로버트 라이시는 이런 피상적 해석을 거부한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그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돈을 빌리게 된 이전에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었다는 원초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경제성장에 따른 "보상의 상당 부분, 아니 거의 대부분이 상류층에게만 돌아간 것", 그는 "이것이 바로 미국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의 핵심"이라고 가려낸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파탄의 근본원인은 소득의 편중
한 줄의 진부한 표현이 슬며시 떠오른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알면 대불황(Great Recession)이 보인다." 라이시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80여 년 전 세계경제의 지층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었던 미국 발 대진재를 세심하게 복기해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닮은 꼴 위기의 배후에 자리 잡은 닮은 꼴 원인 찾기다. 라이시는 파탄의 근본원인을 소득의 편중에서 찾아낸다. 대공황과 대불황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8년과 2007년 미국인의 총소득 가운데 최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은 각각 23%를 넘어섰다.
에클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흡입펌프"가 작동해 생산된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극소수의 손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 경제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1950년대 초에서 1980년대 말까지 그 비중은 10% 내외를 유지했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교과서적 경제문제는 부자들은 소득에 비해 너무 적게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스포츠카를 다섯 대, 열 대 사는 건 아니다.
미시경제의 법칙은 다섯 번째 스포츠카를 계약할 때의 기쁨이 첫 차를 살 때처럼 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득이 줄거나 정체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산된 재화를 충분히 소비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총수요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거시경제의 거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부채의 문제로 옮겨간다. 실질임금이 늘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사회의 환상 속에 사는 중산층이 소비를 바로 줄이는 건 아니다.
갑부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초호화판 생일잔치를 치르는 세상이 되자 그 전시효과로 중산층의 결혼식 비용도 덩달아 뛰어 올랐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거나 일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나름대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대응메커니즘이 한계에 달하자 그들은 저축을 줄이고 빚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부자들은 엄청나게 치솟은 소득과 신용대출한도를 이용해 투기에 나섰다. 제한된 자산, 그러니까 대상이 제한된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기는 당연히 그 폭등을 야기했다. 늘어난 담보나 신용을 토대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중산층도 "이 파티에 합류"했다.
자산 가격은 미친 듯 최고치를 경신해 나갔다. 하지만 자산 거품, 빚 거품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결국 파티는 비극으로 끝났다.
라이시는 이러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본합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위기의 얼개를 재구성한다. 그 합의의 내용은 "근로자들에게 경제성장의 결실을 비례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는 헨리 포드가 임금을 파격적으로 인상해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의 수요를 창출했던 사례를 들면서 포드가 "근로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합의를 이해한 기업인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기본합의의 파탄은 중산층을 고통에 빠트릴 뿐 아니라 총수요 부족이라는 경로를 거쳐 정상의 1%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한 마디로 대공황과 대불황은 바로 이 기본합의가 깨진 데 기인한다. 만일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왕도도 당연히 이 합의의 복원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라이시는 대공황 이후 미국 국민은 "한 마음으로 위기 원인인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한 경제 불안정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필요한 개혁을 해내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불황 이후는 달랐다. 이 책의 원제 '충격 이후'(After Shock)는 '상상회복'의 최면상태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일단 경제 붕괴를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결과 더 큰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약화되고 말았다.
불균형의 심화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제 위기는 정치 위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기업과 금융권이 큰 정부와 짜고서 부자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극우파와 극좌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미적거려서는 문제가 악화할 따름이다.
그는 "심판의 날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고 경고하면서 역소득세와 같은 근본적 대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시는 낙관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개혁만이 유일하고 합리적인 방법
미국이 결국은 개혁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개혁이야말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본합의의 복원, 그 가능성에서 반복되는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보는 것이다. 다만 생태위기, 자원위기가 갈수록 자본주의 경제의 운신을 제약하는 이 시대에 해법의 시야를 인간사회의 궤적에 국한해도 충분한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든다.
김영사
로버트라이시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1만3000원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칼럼니스트
대공황시대의 미국 경제를 포커 판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다. 연준의 의장으로 미국 경제의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매리너 에클스였다. "포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른 플레이어들, 즉 여타의 국민들은 돈을 빌려야만 게임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신용이 바닥나자 게임은 중단되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 막장의 포커 판을 닮은 것 같다. 다만 위기감은 게임의 패자뿐 아니라 승자에게도 전염되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의 주제는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거대한 전환:신모델의 형성'이었다.
이 포럼의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지금 당장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비가 절실하지만 단순한 시스템 정비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위기의 근본원인 찾기다. 흔히 거론되는 원죄는 과소비다. 거기에서 채무 누적과 금융위기로 이어지는 고리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 로버트 라이시는 이런 피상적 해석을 거부한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역임한 그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돈을 빌리게 된 이전에 소수의 플레이어에게 칩이 집중되었다는 원초적 사실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경제성장에 따른 "보상의 상당 부분, 아니 거의 대부분이 상류층에게만 돌아간 것", 그는 "이것이 바로 미국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의 핵심"이라고 가려낸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파탄의 근본원인은 소득의 편중
한 줄의 진부한 표현이 슬며시 떠오른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을 알면 대불황(Great Recession)이 보인다." 라이시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80여 년 전 세계경제의 지층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었던 미국 발 대진재를 세심하게 복기해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닮은 꼴 위기의 배후에 자리 잡은 닮은 꼴 원인 찾기다. 라이시는 파탄의 근본원인을 소득의 편중에서 찾아낸다. 대공황과 대불황이 일어나기 직전인 1928년과 2007년 미국인의 총소득 가운데 최상위 1%에게 돌아간 몫은 각각 23%를 넘어섰다.
에클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흡입펌프"가 작동해 생산된 부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극소수의 손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 경제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1950년대 초에서 1980년대 말까지 그 비중은 10% 내외를 유지했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교과서적 경제문제는 부자들은 소득에 비해 너무 적게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스포츠카를 다섯 대, 열 대 사는 건 아니다.
미시경제의 법칙은 다섯 번째 스포츠카를 계약할 때의 기쁨이 첫 차를 살 때처럼 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득이 줄거나 정체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산된 재화를 충분히 소비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총수요의 구조적 부족이라는 거시경제의 거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부채의 문제로 옮겨간다. 실질임금이 늘지 않더라도 풍요로운 사회의 환상 속에 사는 중산층이 소비를 바로 줄이는 건 아니다.
갑부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초호화판 생일잔치를 치르는 세상이 되자 그 전시효과로 중산층의 결혼식 비용도 덩달아 뛰어 올랐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거나 일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나름대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대응메커니즘이 한계에 달하자 그들은 저축을 줄이고 빚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부자들은 엄청나게 치솟은 소득과 신용대출한도를 이용해 투기에 나섰다. 제한된 자산, 그러니까 대상이 제한된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기는 당연히 그 폭등을 야기했다. 늘어난 담보나 신용을 토대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중산층도 "이 파티에 합류"했다.
자산 가격은 미친 듯 최고치를 경신해 나갔다. 하지만 자산 거품, 빚 거품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결국 파티는 비극으로 끝났다.
라이시는 이러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기본합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위기의 얼개를 재구성한다. 그 합의의 내용은 "근로자들에게 경제성장의 결실을 비례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는 헨리 포드가 임금을 파격적으로 인상해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자동차의 수요를 창출했던 사례를 들면서 포드가 "근로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합의를 이해한 기업인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기본합의의 파탄은 중산층을 고통에 빠트릴 뿐 아니라 총수요 부족이라는 경로를 거쳐 정상의 1%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한 마디로 대공황과 대불황은 바로 이 기본합의가 깨진 데 기인한다. 만일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경제위기를 벗어나는 왕도도 당연히 이 합의의 복원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라이시는 대공황 이후 미국 국민은 "한 마음으로 위기 원인인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한 경제 불안정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주력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필요한 개혁을 해내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대불황 이후는 달랐다. 이 책의 원제 '충격 이후'(After Shock)는 '상상회복'의 최면상태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일단 경제 붕괴를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결과 더 큰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약화되고 말았다.
불균형의 심화를 근본적으로 고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경제 위기는 정치 위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대기업과 금융권이 큰 정부와 짜고서 부자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극우파와 극좌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미적거려서는 문제가 악화할 따름이다.
그는 "심판의 날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고 경고하면서 역소득세와 같은 근본적 대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시는 낙관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개혁만이 유일하고 합리적인 방법
미국이 결국은 개혁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적인 사람들이고, 개혁이야말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본합의의 복원, 그 가능성에서 반복되는 위기로부터의 출구를 보는 것이다. 다만 생태위기, 자원위기가 갈수록 자본주의 경제의 운신을 제약하는 이 시대에 해법의 시야를 인간사회의 궤적에 국한해도 충분한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든다.
김영사
로버트라이시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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