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후진타오에 '코드맞추기'로 황태자 낙점
보시라이, 후진타오 직계 공격하다 오히려 역공
중국 국가 지도부와 전직 원로들이 왕리쥔(王立軍) 충칭시 부시장의 미 총영사관 체류 사건 이후 보시라이(薄熙來) 충칭 당 서기의 비위 혐의 조사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에 서버를 둔 반체제 성격의 중문 사이트 보쉰닷컴(Boxyn.com·博迅)은 13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등 원로들이 보 서기에 대한 조사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유력한 차기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거론되던 보시라이는 현재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충칭시 당 서기다.
보쉰닷컴은 전·현직 국가 지도부가 보 서기에 대한 조사에 합의하면서 내달 초 열리는 양회(兩會)가 시작되기 전에 조속히 결론을 내자는 데에도 견해를 같이했다고 덧붙였다. 또 사건이 이미 중국 안팎에 널리 알려진 만큼 국민에게 조사 결과를 공개하자는 데에도 합의했다고 보쉰닷컴이 주장했다. 아울러 보 서기를 조사하기 위해 중앙 기율검사위는 특별 소조(小組)를 구성했고, 여기에는 천량위 전 상하이 당 서기 사건 및 류즈쥔(劉志軍) 전 철도부장 비리 사건 등 굵직한 권력형 비리 수사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대거 파견됐다고 한다.

◆공청단 태자당의 약한 고리 공격 = 이번 사건을 중국 정계의 최대 파벌인 공청단과 태자당간의 파워게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상하이방에 대항한 공청단과 태자당의 연합구도는 2002년 형성됐다. 당시 16차 전당대회에서 권력을 내놓기로 예정된 장쩌민이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넘기지 않고 버티면서 그의 최측근인 쩡칭홍이 후진타오 주석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쩡칭홍은 장쩌민 집권의 일등 공신이며 분신이었다. 그는 장쩌민 총서기의 집권 초기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시 군부 최대의 실력자였던 양상쿤 세력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또 당시 천시퉁 베이징 시장을 부패 혐의로 제거 최대 라이 벌이었던 베이징방을 숙청함으로써 장쩌민 총서기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데 공헌했다.
공청단과 태자당의 연합은 2006년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끌던 상하이방의 차기 주자였던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천량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쩡칭홍은 후진타오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장쩌민은 자신의 황태자인 천량위의 체포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형사 처분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007년 천량위에 대한 기소를 의결했다. 상하이방의 우방궈, 자칭린, 리창춘 3명은 반대했으며 원자바오, 우관정, 뤄간 3명은 찬성했다. 장쩌민 계열인 쩡칭홍이 기권해 3대3인 상황에서 의장인 후진타오가 찬성해 천량위의 기소가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청단과 태자당의 협공으로 위기에 몰린 장 전 주석이 택한 카드는 태자당인 시진핑 당시 저장성 당서기였다.
그후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연합해 후진타오의 공산주의청년단파에 맞서는 공청단-태자당-상하이방 3자정립 정치지형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노선 차이 = 보시라이가 태자당에 속하지만 중국 국가지도부가 그의 조사에 동의한 것은 명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벌인 범죄와의 전쟁은 전임자인 공청단 출신 왕양 광둥성 서기를 견제하고 중앙상무위원이 되기 위한 출세욕에서 추진됐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절차상의 문제점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시라이의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충칭모델'은 대화와 설득·양보를 중시하는 왕양의 '광둥 모델'과 충돌해 좌·우파 논쟁으로 비화되는 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보시라이의 충징시에서 행보는 시진핑이 대권가도를 달리던 저장성 서기와 상하이 서기 때 보인 모습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저장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도 후진타오가 16차 당대회에서 제창한 새로운 정책에 철저히 코드를 맞추었다. 후진타오는 16차 당대회 이후 조화사회를 축으로 하는 '과학적 발전관'을 천명해 '3개 대표론'을 주장한 장쩌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했다.
시진핑은 이에 코드를 맞춰 조화로운 저장(和諧浙江)이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그는 또 취임 후 6개월 동안 조사연구를 거듭한 끝에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을 저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한 '팔팔전략(八八戰略)'을 수립해 발표했다. 2004년 경제과열로 인해 중앙은 전국에서 거시적 조정, 통제를 시작하자 이를 엄격히 집행했다. 저장성의 고정자산의 투자 증가폭은 2003년의 38.9%에서 2004년에는 20.2%까지 줄였고, 2005년에는 다시 10.5%까지 낮췄다.
시진핑의 이러한 노선은 상하이시위원회 천량위의 행보와 대비되면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큰 환심을 샀다. 시진핑은 방송을 통한 홍보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 중국사회과학원을 동원한 학술적 포장도 계속했다. 시진핑은 저장성에서 후진타오의 노선을 구현함으로써 그의 후계자가 되는 기초를 다졌다.
거시적 조정, 통제정책에 반대하던 천량위 상하이 서기는 후진타오의 철퇴를 맞아 2006년 실각했고 그 자리를 시진핑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 당서기로 부임했을 때도 후진타오-원자바오 총리의 거시경제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천량위 '독립왕국'을 타파하는데 앞장섰다. 천량위는 집값문제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거시경제정책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시진핑은 부임즉시 상하이 부동산국 부국장을 비롯한 인사들을 조사해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시진핑은 부패척결운동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벌여 '상하이방'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해 후진타오에게 확실한 환심을 샀다. 천량위의 11명 동지가 사상 타락의 과정을 자백한 '탐욕의 해악'이라는 영상물을 제작해 각급 당정 관리들이 관람하도록 했다. 3개월 동안 이 영상물을 본 사람은 12만 명이 넘어섰는데, 그중에는 국가급 지도자 간부가 3000명에 달했고 처급 지도자 간부는 4만 명에 달했다.
시진핑이 상하이 1인자로서 7개월 4일 동안 보여준 모습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후진타오에게 황태자로 낙점받기 위한 '충성맹세'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처세는 후진타오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말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자리를 옮긴 그는 티베트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국무원에 계엄령 실시를 요구하고 직접 봉기진압을 지휘해 덩샤오핑과 당 중앙 지도자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덩샤오핑의 낙점을 받아 19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했고, 2002년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선출되어 중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공통분모 = 공청단과 태자당이 다투는 국면이지만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공통분모도 만만치 않다.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1977년중국공산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으며 중국 최고지도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1981년 6월 당 제11기 6회 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마오쩌둥의 오류를 비난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주석에 선출되었고, 1982년 당 기구 개편으로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다
1980년 시중쉰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얼마 안 되어 중앙서기처의 상무서기를 맡았으며, 그 후 다시 1982년의 중국공산당 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등 원로간부의 은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등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 이후 '자산계급 자유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다음해 1월 실각했다. 당시 시중쉰만이 홀로 후야오방을 지지했다.
이로 촉발된 불화가 근원이 되어 시중쉰도 1986년 중국공산당 제 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더 이상 정치국원을 맡지 못했으며, 다음해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게 됐다.
후야오방 사임 당시 시중쉰이 보인 선비 같은 모습은 당내에서 광범위한 찬사를 얻었으며, 시진핑의 든든한 자원이 됐다. 특히 시중쉰과 후야오방의 친밀한 관계는 시진핑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발탁하고 지원한 후견인이었다.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청단 업무를 주관한 후야오방은 후진타오가 명문 칭화대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개혁개방정책 추진의 전위조직인 공청단 출신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천거로 이듬해 공청단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고 이후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청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후진타오는 그 후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진핑은 후야오방 계열로 그를 지지한 집안이고,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또 시진핑과 후진타오는 청화대 동문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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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후진타오 직계 공격하다 오히려 역공
중국 국가 지도부와 전직 원로들이 왕리쥔(王立軍) 충칭시 부시장의 미 총영사관 체류 사건 이후 보시라이(薄熙來) 충칭 당 서기의 비위 혐의 조사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에 서버를 둔 반체제 성격의 중문 사이트 보쉰닷컴(Boxyn.com·博迅)은 13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등 원로들이 보 서기에 대한 조사에 동의했다고 전했다. 유력한 차기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거론되던 보시라이는 현재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충칭시 당 서기다.
보쉰닷컴은 전·현직 국가 지도부가 보 서기에 대한 조사에 합의하면서 내달 초 열리는 양회(兩會)가 시작되기 전에 조속히 결론을 내자는 데에도 견해를 같이했다고 덧붙였다. 또 사건이 이미 중국 안팎에 널리 알려진 만큼 국민에게 조사 결과를 공개하자는 데에도 합의했다고 보쉰닷컴이 주장했다. 아울러 보 서기를 조사하기 위해 중앙 기율검사위는 특별 소조(小組)를 구성했고, 여기에는 천량위 전 상하이 당 서기 사건 및 류즈쥔(劉志軍) 전 철도부장 비리 사건 등 굵직한 권력형 비리 수사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대거 파견됐다고 한다.

◆공청단 태자당의 약한 고리 공격 = 이번 사건을 중국 정계의 최대 파벌인 공청단과 태자당간의 파워게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상하이방에 대항한 공청단과 태자당의 연합구도는 2002년 형성됐다. 당시 16차 전당대회에서 권력을 내놓기로 예정된 장쩌민이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넘기지 않고 버티면서 그의 최측근인 쩡칭홍이 후진타오 주석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쩡칭홍은 장쩌민 집권의 일등 공신이며 분신이었다. 그는 장쩌민 총서기의 집권 초기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시 군부 최대의 실력자였던 양상쿤 세력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또 당시 천시퉁 베이징 시장을 부패 혐의로 제거 최대 라이 벌이었던 베이징방을 숙청함으로써 장쩌민 총서기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데 공헌했다.
공청단과 태자당의 연합은 2006년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끌던 상하이방의 차기 주자였던 천량위 상하이 당서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천량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쩡칭홍은 후진타오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장쩌민은 자신의 황태자인 천량위의 체포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형사 처분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007년 천량위에 대한 기소를 의결했다. 상하이방의 우방궈, 자칭린, 리창춘 3명은 반대했으며 원자바오, 우관정, 뤄간 3명은 찬성했다. 장쩌민 계열인 쩡칭홍이 기권해 3대3인 상황에서 의장인 후진타오가 찬성해 천량위의 기소가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청단과 태자당의 협공으로 위기에 몰린 장 전 주석이 택한 카드는 태자당인 시진핑 당시 저장성 당서기였다.
그후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연합해 후진타오의 공산주의청년단파에 맞서는 공청단-태자당-상하이방 3자정립 정치지형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노선 차이 = 보시라이가 태자당에 속하지만 중국 국가지도부가 그의 조사에 동의한 것은 명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벌인 범죄와의 전쟁은 전임자인 공청단 출신 왕양 광둥성 서기를 견제하고 중앙상무위원이 되기 위한 출세욕에서 추진됐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절차상의 문제점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시라이의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충칭모델'은 대화와 설득·양보를 중시하는 왕양의 '광둥 모델'과 충돌해 좌·우파 논쟁으로 비화되는 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보시라이의 충징시에서 행보는 시진핑이 대권가도를 달리던 저장성 서기와 상하이 서기 때 보인 모습과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저장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도 후진타오가 16차 당대회에서 제창한 새로운 정책에 철저히 코드를 맞추었다. 후진타오는 16차 당대회 이후 조화사회를 축으로 하는 '과학적 발전관'을 천명해 '3개 대표론'을 주장한 장쩌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했다.
시진핑은 이에 코드를 맞춰 조화로운 저장(和諧浙江)이라는 구호를 내놓았다. 그는 또 취임 후 6개월 동안 조사연구를 거듭한 끝에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을 저장에 구체적으로 구현한 '팔팔전략(八八戰略)'을 수립해 발표했다. 2004년 경제과열로 인해 중앙은 전국에서 거시적 조정, 통제를 시작하자 이를 엄격히 집행했다. 저장성의 고정자산의 투자 증가폭은 2003년의 38.9%에서 2004년에는 20.2%까지 줄였고, 2005년에는 다시 10.5%까지 낮췄다.
시진핑의 이러한 노선은 상하이시위원회 천량위의 행보와 대비되면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큰 환심을 샀다. 시진핑은 방송을 통한 홍보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 중국사회과학원을 동원한 학술적 포장도 계속했다. 시진핑은 저장성에서 후진타오의 노선을 구현함으로써 그의 후계자가 되는 기초를 다졌다.
거시적 조정, 통제정책에 반대하던 천량위 상하이 서기는 후진타오의 철퇴를 맞아 2006년 실각했고 그 자리를 시진핑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 당서기로 부임했을 때도 후진타오-원자바오 총리의 거시경제정책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천량위 '독립왕국'을 타파하는데 앞장섰다. 천량위는 집값문제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거시경제정책을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시진핑은 부임즉시 상하이 부동산국 부국장을 비롯한 인사들을 조사해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시진핑은 부패척결운동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벌여 '상하이방'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해 후진타오에게 확실한 환심을 샀다. 천량위의 11명 동지가 사상 타락의 과정을 자백한 '탐욕의 해악'이라는 영상물을 제작해 각급 당정 관리들이 관람하도록 했다. 3개월 동안 이 영상물을 본 사람은 12만 명이 넘어섰는데, 그중에는 국가급 지도자 간부가 3000명에 달했고 처급 지도자 간부는 4만 명에 달했다.
시진핑이 상하이 1인자로서 7개월 4일 동안 보여준 모습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후진타오에게 황태자로 낙점받기 위한 '충성맹세'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처세는 후진타오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말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자리를 옮긴 그는 티베트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국무원에 계엄령 실시를 요구하고 직접 봉기진압을 지휘해 덩샤오핑과 당 중앙 지도자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덩샤오핑의 낙점을 받아 19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했고, 2002년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선출되어 중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설 수 있었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공통분모 = 공청단과 태자당이 다투는 국면이지만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공통분모도 만만치 않다.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1977년중국공산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으며 중국 최고지도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1981년 6월 당 제11기 6회 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마오쩌둥의 오류를 비난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주석에 선출되었고, 1982년 당 기구 개편으로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다
1980년 시중쉰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얼마 안 되어 중앙서기처의 상무서기를 맡았으며, 그 후 다시 1982년의 중국공산당 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정치국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등 원로간부의 은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등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나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 이후 '자산계급 자유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다음해 1월 실각했다. 당시 시중쉰만이 홀로 후야오방을 지지했다.
이로 촉발된 불화가 근원이 되어 시중쉰도 1986년 중국공산당 제 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더 이상 정치국원을 맡지 못했으며, 다음해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게 됐다.
후야오방 사임 당시 시중쉰이 보인 선비 같은 모습은 당내에서 광범위한 찬사를 얻었으며, 시진핑의 든든한 자원이 됐다. 특히 시중쉰과 후야오방의 친밀한 관계는 시진핑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발탁하고 지원한 후견인이었다.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청단 업무를 주관한 후야오방은 후진타오가 명문 칭화대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개혁개방정책 추진의 전위조직인 공청단 출신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천거로 이듬해 공청단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고 이후 전국청년연맹 제6기 주석을 거쳐 1984년 공청단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됐다. 후진타오는 그 후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진핑은 후야오방 계열로 그를 지지한 집안이고,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또 시진핑과 후진타오는 청화대 동문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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