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 해석한 후쿠시마 대재난
박순철 칼럼니스트
그린비/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윤여일 옮김/1만5000원
지난 해 3월 일본 동북지방에 밀어닥친 대재난을 해석하는 열여덟 편의 글, 일본의 사상가, 사상비평가, 정신병리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아나키스트, 영화평론가로 소개된 사람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광각의 모자이크를 보여준다.
재난에는 메시지가 있다. 큰 재난에는 큰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큰 그림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 여러 사람의 많은 눈은 진실 찾기에 필요한 조각 그림들을 폭넓게 제공한다.
지난 해 3월 일본 동북지방에 밀어닥친 대재난을 해석하는 열여덟 편의 글, 그러니까 일본의 사상가, 사상비평가, 정신병리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아나키스트, 영화평론가로 소개된 사람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그런 광각의 모자이크를 보여준다.
그들은 나름의 열쇠를 찾아들고 이 거대한 비극의 진실을 열려고 시도한다. 철학자 에가와 다카오씨가 동원한 키워드는 '취약함의 규모'(scale of vulnerability)다.
미국의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주조한 이 개념은 단순명료하다.
인류는 단기간의 가뭄이나 호우처럼 빈번히 일어나는 작은 재해에 대한 통제능력을 얻는 대가로 드물게 일어나는 대재난에 대한 취약함의 증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문명적 취약함, 이 불감증에서 안전 신화는 태어난다. 이 신화에서 인간 사회는 초대형 유조선이 된다.
페이건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 배의 사령실에 있는 누구 하나도 해도나 일기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고 권력자는 폭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렇다면 순수한 자연재해, 순수한 천재라는 건 없게 된다. 자연재해의 규모는 인간과 사회가 지닌 취약성과 불가분한 것이다.
에가와씨는 이렇게 말한다. "천재란 오히려 인재라는 개념 아래서 날조된 사고방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재해는 "천재와 인재의 융합"이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지진-해일-원전사고로 이어진, 그러니까 현상 자체도 천재와 인재의 융합으로 나타났던 '3·11'의 책임을 다룰 장치가 마련된다.
우선 대재난 직후 일본 사회를 논란의 회오리에 빠뜨렸던 '상정 외'라는 구실의 정체가 드러난다. 특정한 수치로 표현되는 진도나 해일, 그 이상은 설계의 상정 밖이었다는 설명은 편리한 탈출구를 제공한다. 그러나 철학자 히가키 다쓰야씨에게 이는 기능주의의 환상일 따름이다. 그는 인간의 계산과 사고는 자연을 간파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발상, 즉 그 자체에 이미 재난이 잉태돼 있는 발상에 근거해 책임과 무책임을 가르는 안이한 타성을 질책한다.
책임의 실종은 공동 책임의 일본적 전통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이가 실수하면 부모가 사죄하고, 교사와 교장이 사죄하고, 지역사회가 사죄하는 동질적 공동체에서는 엎드려 조아림의 광경은 있지만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우지 못하는 '애매함'은 여전한 것이다.
히가키씨는 대진재에서 드러난 "리스크 문제, 책임 추궁, 조아림과 같은 것들은 분명 일본인적 정경을 보여 줬고, 그것을 파고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지게 된 무거운 과제"라고 지적한다.
지진과 함께 낡은 관념이 흔들렸고, 낡은 진실의 정체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매스컴의 추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예평론가 가토 노리히로씨의 날선 비판. "(대진재 한 달 뒤인) 4월 초순, 일본의 미디어는 없었습니다.
안전권에서 전화로 취재하면서 기사에는 그걸 기록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면서도 그걸 밝히지 않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어느 새 공범자로 떨어져 있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그건 실체를 감추기 위한 위장술 같은 것이죠." 철학자 다지마 마사키씨는 은폐의 공모체제를 지난날의 전시 '익찬체제'(翼贊體制)로 비유한다.
대지진은 도쿄전력을 중심으로 하는 역대 정권과 기업의 유착관계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매스컴도 뉴스 해설을 하는 학자나 평론가도 오히려 우리 눈에서 진실을 숨기는 가림막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여전히 그들은 대본영 발표를 타전한다"고 그는 말한다.
(옮긴이의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후쿠시마에 사는 여고생이 쓴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쓰나미와 방사능으로 무너진 세계에서 어린 소녀가 느꼈던 절망감. "정치가도 국가도 매스컴도 전문가도 원전의 상층부도 모두 적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원전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쓰나미 영상, 매스컴의 매정한 인터뷰, 입에 발린 애도의 말, 피해를 '천벌'이라고 둘러댄 정치가.")
그러나 일본의 원전은 아직 건재하다. 일시적 가동 중단이 완전 폐기를 의미하는 건 물론 아니다. 진실의 전모, 그 깊숙한 노심은 과연 드러날 것인가.
다지마씨는 "3·11'의 가장 큰 특징이자 우리의 힘을 빼는 것은 원전 파괴가 초래한, 정신이 아찔해 지는 시간 단위"라면서 "은폐의 시도는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 신화적 시간의 아찔한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중세의 신화를 동원한다. 방사능을 잠재우려는 "석관은 언제까지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끝없이 피를 흘리는 '파르지팔'의 주인공처럼 플루토늄의 폐수를 흘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결국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진리파지운동이 떠오른다. 그런데 진실을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우화의 맹인들처럼 진실의 단편들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먼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 사사키 아타루씨의 말은 이 모든 논의를 간결하게 다듬는다. 그는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려면 봉건적 습성의 계략으로 가득한 종래의 '건전한 도의'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몸이 되어 진실에 발을 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진, 무너지는 대지의 궁극적 계시이다. "낡은 대지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대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계속되는 여진처럼 집요한 하나의 의문. 방사능을 가둔 석관이 전설의 어부 왕처럼 끝없이 피를 흘려도 궁극적 승리자는 시간과 망각이 되는 게 아닌가.
벌써 재난의 통각은 무디어지지 않았는가. 비극마저 망각에 뺏기지 않기 위해서도 새로운 대지(Grund), 새로운 근거(Grund) 찾기는 요청된다. 아마 이 근처가 '사상으로서의 3·11'을 계속 더듬어 보게 되는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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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철 칼럼니스트
그린비/쓰루미 슌스케 외 지음/윤여일 옮김/1만5000원
지난 해 3월 일본 동북지방에 밀어닥친 대재난을 해석하는 열여덟 편의 글, 일본의 사상가, 사상비평가, 정신병리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아나키스트, 영화평론가로 소개된 사람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광각의 모자이크를 보여준다.
재난에는 메시지가 있다. 큰 재난에는 큰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큰 그림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 여러 사람의 많은 눈은 진실 찾기에 필요한 조각 그림들을 폭넓게 제공한다.
지난 해 3월 일본 동북지방에 밀어닥친 대재난을 해석하는 열여덟 편의 글, 그러니까 일본의 사상가, 사상비평가, 정신병리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아나키스트, 영화평론가로 소개된 사람들의 글을 모은 이 책은 그런 광각의 모자이크를 보여준다.
그들은 나름의 열쇠를 찾아들고 이 거대한 비극의 진실을 열려고 시도한다. 철학자 에가와 다카오씨가 동원한 키워드는 '취약함의 규모'(scale of vulnerability)다.
미국의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주조한 이 개념은 단순명료하다.
인류는 단기간의 가뭄이나 호우처럼 빈번히 일어나는 작은 재해에 대한 통제능력을 얻는 대가로 드물게 일어나는 대재난에 대한 취약함의 증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문명적 취약함, 이 불감증에서 안전 신화는 태어난다. 이 신화에서 인간 사회는 초대형 유조선이 된다.
페이건은 이렇게 묘사한다. 이 배의 사령실에 있는 누구 하나도 해도나 일기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고 권력자는 폭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렇다면 순수한 자연재해, 순수한 천재라는 건 없게 된다. 자연재해의 규모는 인간과 사회가 지닌 취약성과 불가분한 것이다.
에가와씨는 이렇게 말한다. "천재란 오히려 인재라는 개념 아래서 날조된 사고방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재해는 "천재와 인재의 융합"이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지진-해일-원전사고로 이어진, 그러니까 현상 자체도 천재와 인재의 융합으로 나타났던 '3·11'의 책임을 다룰 장치가 마련된다.
우선 대재난 직후 일본 사회를 논란의 회오리에 빠뜨렸던 '상정 외'라는 구실의 정체가 드러난다. 특정한 수치로 표현되는 진도나 해일, 그 이상은 설계의 상정 밖이었다는 설명은 편리한 탈출구를 제공한다. 그러나 철학자 히가키 다쓰야씨에게 이는 기능주의의 환상일 따름이다. 그는 인간의 계산과 사고는 자연을 간파하고 설계할 수 있다는 발상, 즉 그 자체에 이미 재난이 잉태돼 있는 발상에 근거해 책임과 무책임을 가르는 안이한 타성을 질책한다.
책임의 실종은 공동 책임의 일본적 전통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아이가 실수하면 부모가 사죄하고, 교사와 교장이 사죄하고, 지역사회가 사죄하는 동질적 공동체에서는 엎드려 조아림의 광경은 있지만 책임을 져야할 당사자에게 책임을 지우지 못하는 '애매함'은 여전한 것이다.
히가키씨는 대진재에서 드러난 "리스크 문제, 책임 추궁, 조아림과 같은 것들은 분명 일본인적 정경을 보여 줬고, 그것을 파고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지게 된 무거운 과제"라고 지적한다.
지진과 함께 낡은 관념이 흔들렸고, 낡은 진실의 정체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매스컴의 추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예평론가 가토 노리히로씨의 날선 비판. "(대진재 한 달 뒤인) 4월 초순, 일본의 미디어는 없었습니다.
안전권에서 전화로 취재하면서 기사에는 그걸 기록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면서도 그걸 밝히지 않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어느 새 공범자로 떨어져 있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그건 실체를 감추기 위한 위장술 같은 것이죠." 철학자 다지마 마사키씨는 은폐의 공모체제를 지난날의 전시 '익찬체제'(翼贊體制)로 비유한다.
대지진은 도쿄전력을 중심으로 하는 역대 정권과 기업의 유착관계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매스컴도 뉴스 해설을 하는 학자나 평론가도 오히려 우리 눈에서 진실을 숨기는 가림막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여전히 그들은 대본영 발표를 타전한다"고 그는 말한다.
(옮긴이의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후쿠시마에 사는 여고생이 쓴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쓰나미와 방사능으로 무너진 세계에서 어린 소녀가 느꼈던 절망감. "정치가도 국가도 매스컴도 전문가도 원전의 상층부도 모두 적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원전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쓰나미 영상, 매스컴의 매정한 인터뷰, 입에 발린 애도의 말, 피해를 '천벌'이라고 둘러댄 정치가.")
그러나 일본의 원전은 아직 건재하다. 일시적 가동 중단이 완전 폐기를 의미하는 건 물론 아니다. 진실의 전모, 그 깊숙한 노심은 과연 드러날 것인가.
다지마씨는 "3·11'의 가장 큰 특징이자 우리의 힘을 빼는 것은 원전 파괴가 초래한, 정신이 아찔해 지는 시간 단위"라면서 "은폐의 시도는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 신화적 시간의 아찔한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중세의 신화를 동원한다. 방사능을 잠재우려는 "석관은 언제까지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끝없이 피를 흘리는 '파르지팔'의 주인공처럼 플루토늄의 폐수를 흘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결국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진리파지운동이 떠오른다. 그런데 진실을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우화의 맹인들처럼 진실의 단편들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먼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 사사키 아타루씨의 말은 이 모든 논의를 간결하게 다듬는다. 그는 새로운 도덕을 수립하려면 봉건적 습성의 계략으로 가득한 종래의 '건전한 도의'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몸이 되어 진실에 발을 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진, 무너지는 대지의 궁극적 계시이다. "낡은 대지는 무너졌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대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계속되는 여진처럼 집요한 하나의 의문. 방사능을 가둔 석관이 전설의 어부 왕처럼 끝없이 피를 흘려도 궁극적 승리자는 시간과 망각이 되는 게 아닌가.
벌써 재난의 통각은 무디어지지 않았는가. 비극마저 망각에 뺏기지 않기 위해서도 새로운 대지(Grund), 새로운 근거(Grund) 찾기는 요청된다. 아마 이 근처가 '사상으로서의 3·11'을 계속 더듬어 보게 되는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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