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라 하면 광개토대왕비가 먼저 떠오른다. 대륙침략에 눈먼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그 비문을 변조한 비밀을 밝혀낸 사람이 아닌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움직일 수 없는 근거라던 주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 진실의 발현이었다. 10여일 전 신문에서 부음 소식에 접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역저 '광개토대왕비의 탐구'(1982·일조각)를 다시 읽어보았다. 민족의 보물이라는 감동이 새로웠다.
30년 세월 그 한 가지에 매달려 찾아낸 광개토대왕비의 비밀은 무섭고 놀라운 일 투성이였다. 고서에 나오는 황당한 기록(임나일본부)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일본은 비 전면에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것을 먹으로 뜬 것을 탁본이라고 속여 역사를 조작했다. 책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변조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는 이 저서가 나온 뒤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었으니, 역사학자 한 사람의 공로가 놀랍다.
그는 일본 참모본부가 최초의 탁본이라고 속인 쌍구가묵(雙鉤加墨)본의 비밀부터 파헤쳤다. '쌍구'란 글자 획 주위에 선을 그어 모사하는 기법이다. 거기에 먹칠을 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찍어낸 탁본과는 근본이 다르다. 모사자의 의도가 가미될 수 있는 사본이다.
이것이 참모본부에 입수된 것이 1883년이었다. 이의 해독에 당대 일본 석학들이 총동원되었다. 멀리 중국 땅에서 온 비문의 이용가치에 현혹되어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 경영설'의 근거로 변조했다는 주장이 석회도부설(石灰塗付說)이다.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들이 원하는 글자를 새겨 넣어 탁본으로 떴다는 것이다.
시행착오로 잘못된 글자를 새겨 넣었다가 고치는 해프닝까지 일어났다니 고소를 참기 어렵다. 수십 가지 탁본사진을 비교해 보면 글자의 위치가 잘못된 것에서부터, 없던 글자가 생겨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잘 보이던 부분이 갑자기 해독불능 상태로 변하기도 한다.
'임나일본부 경영설'의 근거로 변조
이렇게 변조된 문장이 유명한 신묘년(辛卯年) 기사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000羅以爲臣民'으로 변조한 비문을 그들은 '왜가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00,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근거라는 역사 조작이다. 현지에 가서 비문을 볼 길이 없었던 시대, 처음부터 이렇게 변조된 비문의 해석을 명쾌하게 반박할 근거를 우리 학계는 찾을 방도가 없었다.
광개토대왕비는 쌍구가묵본 제작 2, 3년 전에 발견되었다. 고구려 옛 도읍지는 오랜 봉금의 땅이었다. 1880년 무렵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도 하고, 쓰러져 넝쿨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고도 한다. 반쯤 묻히고 반쯤 잡초에 묻혀 있었던 모양이다. 비문을 읽을 수 없어 잡초를 걷어내고 태우고 하느라고 비가 일부 손상되었다는 일본의 기록은 사실로 보인다.
그 비의 존재를 알고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귀국한 사코 가게아키(酒勾景信) 중위가 일본 참모본부 소속의 밀정이었다는 사실, 통째로 비를 일본에 가져가려고 했던 일도 이진희 교수가 밝혀낸 진실이다.
대륙침략 야욕에 불타던 일본 군부가 만주와 한반도에 수많은 밀정을 파견했고, 그들의 활약으로 압록강 하구에 군함을 대고 반출을 시도했던 사실은 사진으로도 증명된다.
연전 압록강 일대 고구려 유적지 관광여행 때 가본 광개토대왕 비석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돌의 4개면에 빼곡한 비문을 베꼈다는 전문사본을 사왔지만, 어디까지 진실인지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유물을 가지고 일본이 장난질 치고, 현지 중국인들은 장삿속으로 그들에게 놀아나,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역사의 변전이 속상하다.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비석
고 이진희 교수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추모의 정이 더 애틋하다. 도쿄 근무시절 임진왜란 400주년을 맞아 현장취재 임무가 떨어졌을 때, 그의 안내로 큐슈 구석구석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도요토미 군의 출진기지였던 나고야(名護屋)성 현장을 비롯해 잡혀온 도공과 기술자들 발자취, 대마도 곳곳의 중간기지 현장을 그가 아니면 어떻게 찾아갔겠는가.
약주를 즐겼던 그는 "오늘 밤 술사는 것을 보아 내일 안내를 결정하겠다"는 농담으로 저녁식사의 흥취를 더하곤 했다.
장례식에 가보지 못한 결례가 오래 부끄럽다. 여든 둘 연치도 애석하다. 사적인 연이 아니더라도 광개토대왕의 오랜 한을 풀어준 공을 기려, 영전에 마음의 술잔이라도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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