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이 사회의 50대 후반 몇 명이 며칠 전 술잔을 나누었다. '4·11 총선' 뒷이야기로 시작한 대화는 통합민주당 비판으로 이어지더니 곧바로 올해 12월로 예정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예상 후보들에 대한 평가로 모아졌다.
화제의 중심은 단연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었는데, 자리에 함께 한 사람 가운데 지지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너 나 없이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내놓았다. 결론은 '박근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에 절대 안된다'였다.
하긴 고등학생 때 '유신 선포'를 겪었으며 197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했고 군대 3년을 마친 다음 80년대 초 졸업한 우리에게, 박정희는 글자 그대로 악몽이었다. 따라서 그 같은 결론은 지극히 당연할 터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한 친구가 문득 이의를 제기했다."어쨌거나 박정희 딸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 연좌제를 적용하는 논리 아니야?"
대한민국 헌법은 연좌제를 금지한다. 헌법 제13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돼 있다.
따라서 박근혜 위원장이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면 말한다면 이는 헌법의 정신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알고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억지에 불과해 보인다.
과연 그런가. 박 위원장에게서 박정희의 그림자를 느껴 거부반응부터 일으키는 일이, 의식의 저 밑바닥에 잠재한 감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추슬러 이성을 동원하더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1998년 정치에 정식으로 입문한 뒤로 박 위원장은 아버지 박정희의 유업을 잇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해 왔다.
사죄나 뉘우침보다 정치적 수사
2006년 11월 14일 박정희 생가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해 "흩어진 국민의 힘과 마음을 모아 아버지가 바라던 선진 강국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저 역시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강조한 게 대표적인 예이다. 5·16 쿠데타에 관해서도 박 위원장은 단 한 번도 그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에게 5'16은 변함없는'구국의 혁명'일 뿐이다.
박 위원장이 박정희 시대의 과오에 유감을 표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수준이란 지난 3월 부산을 방문해 발언한 데서 드러나듯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는 정도에 그친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나 뉘우침이라기보다는 대선을 염두에 두고 표를 계산하는 정치적 수사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박 위원장의 현재 위상은 혈연상 박정희의 딸이라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대권을 노리고 정치활동을 계속하는 한 그는 박정희의 이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정치적인 계승자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더 이상 연좌제와 하등 상관이 없다. 단순히 혈연관계에 따른 거부감이 아니라 정치적인 DNA를 물려받은 '박정희의 딸'을 부정하는 일은 이 시대 한국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누구인가.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복무했다. 1961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4·19혁명으로 싹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72년에는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집권을 획책했다.
흔들린 민주주의 틀 바로잡을 시점
그가 집권한 18년 7개월 동안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친 숱한 이들이 목숨을 희생했다. 그런 독재자의 정치적 유전자를 2012년 되살리자고?
이제 닷새 뒤면 5·16 쿠데타 51주년을 맞는다. 그 이틀 뒤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2주년이 기다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극이 발생한 날은 2009년 5월 23일이었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정치적 함의로 충만한 달이기도 한 것이다.
앞 세대가 피와 눈물로 일구어온 민주주의의 틀은 지난 5년 간단(間斷) 없이 흔들렸다. 지금은 이를 바로 잡을 시점이다. 50~60년 전'박정희 악몽'으로 되돌아가서는 우리 역사에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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