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언론인·번역가
삼천리 실라 로보섬 저/최재인 옮김/2만3000원
이 책은 아나키즘에서 자유주의까지 다양한 정치적 주장을 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의식 이전부터 '여성은 개인적 주체'라는 인식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원제는 '새 날을 꿈꾼 사람들'(Dreamers of a New Day)이고 부제는 '20세기를 만든 여성들'(Women Who Invented the 20th Centry)이다. 그 외에 이 책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여기서 "설명 끝!"하고 마쳐도 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양성평등 사회를 목표로 세세한 여성권익을 쟁취하기 위한 급진적 사회운동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독자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여성운동가들이 '여자 같지 않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졌던 독자라면 페미니즘 관련서중 고전에 속하는 이 책에서 '책읽는 재미'와 (나중엔 중대해지는) 사소한 것들의 역사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두 배로 느낄 것 같다.
책에서 말하는 20세기를 만든 여성은 1800~1900년대 영미 여성들이지만 결국 '여자란 …' '여자가 감히 …' 에 이어지는 말들은 전통적 여성관의 본질이 세계적으로 똑같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에는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으로 보아 '여성 리더십은 안된다'고 공언하는 정치인도 있다.
저자 실라 로보섬( 맨체스터대학 젠더와 노동사, 사회학 교수)은 영국의 마르크스계열 사회주의자, 페미니즘 이론가, 작가이며, '가디언' '타임스' '인디펜던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학자다.
여성운동관련 저작물이 많은데, 한국에서도 그의 '역사로부터 숨겨진 것'(1974)이란 책이 '영국 여성운동사'(1982년간 이효재 역)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 있다.
'괴짜'여성들 , 침묵의 일상을 깨다
여성들이 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대학교육을 받고 카페와 술집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환담을 하거나 심지어 남자들과 '대등한' 모습으로 일하는 것은 지금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여성들에게는 그것은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하나의 '꿈'이었다.
책의 2장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등장하는 사우샘프턴의 사회주의자 노동계급출신의 플로렌스 엑스턴-한(훗날 여성참정권 운동가)은 1890년대 어머니와 함께 자전거타기 클럽을 하면서, 좀 다르게 살려는 여성들이 부닥치는 현실을 실감하게 된다.
"엄마와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탔다. 그러나 항상 치마를 갖고 다녔다. 도심으로 들어갈 때는 몰매를 피하기 위해 치마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바지를 처음 도입한 이들은 19세기 중반의 사회주의자와 선진 여성들로 '확실한 해방의 인상' 때문에 대중의 비난과 조롱이 집중되었다.
폭넓은 치마바지의 발명은 영국에서 1888년 창립된 '합리적 의상 협회'의 실용적 창작품이었다.
보수적인 영국에서 변화의 기치를 먼저 든 여성의 힘은 산업화에 따른 여성노동자의 등장으로 많은 여성들이 다양한 방향에서 계급과 무관하게 일상을 바꾸는 일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장 노동자 뿐 아니라 케임브리지출신으로 이 대학과 옥스퍼드대에서 정치경제학 강의를 하던 메리 페일리같은 인물도 초기의 '의상 혁명'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 뛰어난 심미안의 주인공은 1877년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과 결혼, 위대한 남편의 내조자로 살며 세상에서 차츰 잊혀져 갔고, 여성주의자들로부터 그렇게 돼서는 안되는 전례로 비난 받기도 했다.
국제 무역의 확대, 대량생산, 이민, 도시화와 슬럼등으로 격변하는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미국과 영국의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자생적 '새로운 운동'이 있었다.
이 책은 아나키즘에서 자유주의까지 다양한 정치적 주장을 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의식 이전부터 '여성은 개인적 주체'라는 인식을 했음을 보여준다.
"외모와 행동의 관행에 저항하는 건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노동계급의 신여성들은 장식 없는 블라우스에 타이를 매고 카페에 앉아 결혼, 가정, 노동조건에 관해 토론을 하곤 했는데 1860년대의 한 적대적 관찰자는 '핼쑥하고 피곤에 절은, 작은 입술과 납작한 가슴의 까칠한 여자들이 걸핏하면 자정까지 카페에 앉아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여성들의 자각은 연애, 결혼, 출산, 피임, 모성, 가사일 같은 개인 문제에서 인종, 임금노동, 여성참정권, 사회복지, 공공 주택, 연금제도 같은 공공의 사회적 정책으로 확장됐다. 이들은 대서양을 넘나들며 기존 시민사회의 통념과 문화를 뒤집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꿈은 당대의 상식으로는 '발칙한' 것이었고 몰매감이었다.
실제로 애인과 결혼대신 동거를 하기로 한 여성은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고, 피임법을 인쇄해 알렸다는 이유로 수많은 여성들이 투옥되기도 했다.
미국의 마거릿 생어는 투옥직전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여성들과의 연대하에 일을 계속했고 미국 사회복지운동의 선구자 제인 애덤스는 런던의 사회복지관 토인비홀에서 받은 영감으로 시카고에 헐하우스를 세우는 등, 계층과 국적을 떠난 네트워크는 여성운동의 힘의 원천이었다.
피임법 전파로 투옥된 100년전 여성들
사소한 것들의 변화라도 희생과 실천 없이 이뤄진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알려준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위해 여성운동가들은 공동 육아, 공동 취사를 하는 공영주택 기획에 나섰고, 시 정부를 움직이거나 개인 재산을 털어서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노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몇 달씩 공장에 취업하거나 노조가 있는 공장 제품만 따로 파는 조합상점 마련, 노조 없는 사업장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등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투쟁 방식과 영감이 100년전 여성들의 창의력과 실천력에서 비롯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들의 투쟁이 '절반 인구'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것이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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