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칼럼니스트
도서출판 새로운 제안/장승규 지음/ 1만원
1938년 스웨덴 노·사·정의 '살트셰바덴 협약'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의 차등 의결권 제도를 도입하여 오너 일가의 상속적인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는 반면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토록 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좋은 경제', '착한 경제'를 이루자는 것이다.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창의성을 바탕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며 국가 전체적으로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함으로써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게 그 주안점이다.
헌법 제119조 1항 및 2항의 조문에 들어 있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이 문제다. 서민과 기업의 의견이 엇갈리며, 기업 중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견해가 갈라진다. 특히 올해말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당간에 정치적 공방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논란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재벌개혁 문제다. 재벌을 개혁하면 불균형한 성장과 분배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라는 게 공격의 논리라면 재벌이 이룩해놓은 성과를 무시하고 그 폐해만 부각되고 있다는 게 방어의 논리다. 지금껏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법인세 인하 및 동반성장의 논쟁이 여기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 바탕에는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는 재벌기업의 문어발 경영방식이 우리 사회의 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뿌리깊은 인식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도 그런 점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동네마다 골목 상권까지 침투함으로써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마구잡이 영역확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기들끼리 일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제과점과 식당업까지 진출하여 논란을 빚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재벌기업이라고 해서 항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히는 발렌베리(Wallenberg) 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150여년 동안에 걸쳐 5대째 내려오고 있는 발렌베리는 기업 차원의 적극적인 사회 환원과 후계자들의 검소한 생활 태도로 스웨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 '발렌베리가의 신화'는 그룹의 태동에서부터 지금까지 거쳐온 과정을 살펴보면서 국민적 신뢰를 얻게 된 배경을 추적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권 문제다. 발렌베리의 후계자들이 스웨덴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정작 개인 재산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기업이 형성해놓은 재산은 공익재단의 소유로 되어 있으므로 오너라고 해야 스웨덴의 100대 부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해마다 그룹 이익금의 85%를 법인세 형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게 바로 발렌베리 그룹이다.
중공업이나 첨단산업 등 대기업의 영역을 확실히 지킴으로써 중소기업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발렌베리의 덕목이다. 그룹의 모태가 되는 SEB 은행을 비롯해 일렉트로룩스, 에릭손, 사브, ABB 등 통신·기계·의료·방위·항공 분야에 폭넓게 손대고 있으면서도 유통이나 식품 등 중소기업 분야는 아예 넘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경제 집중도가 높으면서도 증여·상속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를 야기한 경우도 별로 없다.
발렌베리 오너 일가가 소유 지분에 대해 '차등 의결권'을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세습 경영권을 확실하게 보장받게 된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현재 오너 일가의 지주회사 지분률이 5.3%에 불과하면서도 행사하는 의결권은 20% 이상이다. 기업의 인수·합병 분야에서 공정한 게임을 위해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영국과 독일 등 외국으로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스웨덴 정부는 응하지 않고 있다.?정부가 나서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차단할 만큼 신뢰가 각별하다는 얘기다.
스웨덴의 다른 재벌기업들이 무거운 세금을 피해 스위스 등지로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발렌베리는 노벨재단보다 훨씬 큰 규모의 크누트앤앨리스 공익재단을 만들어 민간의 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뒷받침했다. 스웨덴 정부가 외국과 무역협상을 진행할 경우에는 막후 협상을 수행하기도 했다. 거의 '국민 기업' 수준인 셈이다.
특히 1938년 스웨덴의 노·사·정 사이에 타결된 '살트셰바덴(Saltsjobaden) 협약'은 주목할 만하다. 앞서의 차등 의결권 제도를 도입하여 오너 일가의 상속적인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는 반면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토록 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끝에 도출된 스웨덴식 협상안이었다. 발렌베리 그룹의 후계자들이 재벌가에 따르기 마련인 특권의식을 스스로 배제하고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사명의식을 지니게 된 연원이기도 하다.
발렌베리 그룹이 각 세대에 걸쳐 관행적으로 2명씩의 최고경영자를 두는 '투톱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금융 및 산업 부문의 경영을 분리하려는 취지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모든 권한이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위험을 줄이는 한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발렌베리 그룹이 국내 재벌기업을 대표하는 삼성그룹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삼성은 2003년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스웨덴을 방문하게 되면서 이 그룹의 지배구조와 운영방식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3월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이재용 사장과의 회동이 이뤄졌던 것이다.
저자가 발렌베리의 경영방식을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삼성은 과연 '한국의 발렌베리'가 될 수 있을까"라며 눈길을 우리 내부로 돌리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들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우리 정부 일각에서 발렌베리 그룹의 경영방침을 참조하며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개선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주안점은 '경제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우리 경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성장을 이루면서도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조화로운 분배 방식을 이끌어내자는 얘기다. 저자가 "과거에는 기업의 화려한 실적만이 뉴스거리가 될 뿐이었으나 이제는 기업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생각해볼 시점이다"라고 강조하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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