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도척’을 따르지 못한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재벌 총수에게 말한 기자를 알고 있다. 그 기자는 재벌 총수와의 인터뷰를 맡은 부장급이었다. 중요한 면담기사이므로 그는 사진부장과 함께 약속시간을 지켜 총수의 집무실로 갔다. 인터뷰를 잘 끝내자 총수는 ‘관례처럼’ 봉투를 내놓았다. 취재부장은 그 손이 무안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말했다. “회장님, 그 봉투를 받으면 제 목 달아납니다. 주시려면 평생 먹을 만큼 주십시오.” 그 농담에 회장님은 봉투를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은 한국 언론 현장에서는 ‘삽화적인 일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자가 감히 취재원에게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말하며 돈 봉투를 물리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삽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도 언론인의 ‘품격’ 항목이 들어있는 ‘신문윤리실천요강’이 있다. 품격 제1항은 “물질적 정신적임을 막론하고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아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다.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한 기자는 그 자리에서 품격 제1항을 실천했을 뿐이다.
언론은 유혹에 약하다. 언론의 권력이 클수록 유혹의 손도 커진다. 언론 부패의 뿌리는 일제 하의 언론시기부터 커왔다. 그 시절에 이미 언론인은 출입처나 취재원과의 접촉과정에서 금전, 향응, 접대의 유혹에 노출되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동아일보의 이광수는 신문기자의 직업에 필요한 소양으로 아홉 가지를 소개하는 가운데 술(酒), 여자(色), 돈(金)을 조심하라고 이런 글을 썼다.
“신문기자의 3대기(三大忌)라는 것이 잇으니 그것은 주, 색, 금입니다. 주도, 호색가, 애금가는 반다시 신문을 망치는 기자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주, 색, 금을 따르는 이에게는 정의를 바랄 수 없고 오직 부패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취재원인 ‘각층(各層)’이 언론인을 요정 등에서 환대하며 떠받들고 언론인은 이에 도취하는 수준이었다.
“주시려면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 촌지 거절
언론은 뉴스를 발굴하고 생산하기 위해 각층의 취재원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그 때문에 인식구조가 서로 다른 언론과 취재원은 독립적 관계에서 갈등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양자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유형은 취재원이 언론을 흡수해버리는 경우이다. 이때 언론은 취재원의 완전한 ‘포로’가 되고 만다. 권력과 금권의 포로가 된 언론은 제 역할을 포기한 언론이다.
포로가 된 언론의 유형 가운데 권언유착은 이미 ‘고전적’인 것이 되었다. 작년의 ‘언론대책 문건’ 사태는 권언유착의 전형이었다. 북경에서 연수하고 있던 한 기자가 여당 부총재에게 왜 수상스럽고 음모적인 언론대책 문건을 ‘보고’했는지 아직도 석연히 가려지지 못했다. 이 사태의 두 번째 주역인 한 방송 기자는 ‘예외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당 부총재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에 “…위원장님을 곁에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하는 표현을 썼다고 알려진다. 언론인이 제 발로 정치권력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한 모습이었다.
2002년, 새해 벽두부터 천하에 혼돈과 혼탁이 소용돌이친다. 그 한가운데 낀 주역의 하나가 언론이다. ‘패스21’과 얽히고설킨 언론인들의 의혹을 가리켜 한 시사잡지는 언론과 벤처의 ‘신종 불륜’이 생겼다고 풍자했다. 세상이 혼탁할 때면 ‘신음어적(呻吟語摘)’의 경구가 생각난다. 중국 명나라 관리로서 관료의 타락을 개탄한 여곤(呂坤)의 저서 ‘신음어적’을 다시 펼쳐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는 “사람들은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만 예의범절의 실행에 힘쓰지 암실(暗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인간의 이중성을 집어냈다. 그래서 여곤은 중국 춘추시대의 큰 도둑 ‘도척’은 차라리 큰 악인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도척’은 겉과 속이 따로 없었고 재물을 훔쳤으되 명예는 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언론, 한번 더 죽었다 살아나 도덕적 힘 얻어야
우리는 고위직 관리와 함께 언론인마저 명예를 거머쥐고도 재물을 탐하다가 연속적으로 비리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면역이 되었다. 집권 말기에 접어든 김대중 대통령은 야윈 뺨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연두기자회견을 했다. 중요한 비리사건을 전담할 특별수사검찰청을 조속히 설치할 것이라고 처방전을 냈으나 만시지탄이다.
언론학 연구자들은 뉴스 생산품은 권력 엘리트라는 진원지를 출발하여 언론 매체의 취재자 및 편집자(이를 ‘게이트키퍼’라고 불렀다)를 거친 다음 뉴스 소비자 앞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뉴스 생산자는 각층의 취재원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양자의 배타적이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거래는 그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언론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인 권력으로 하여금 법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구실이다.
언론은 한번 더 죽었다가 새롭게 살아나 도덕적 힘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말하고 실천한 한 기자의 ‘삽화적 일화’가 ‘일상적인 삶’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재벌 총수에게 말한 기자를 알고 있다. 그 기자는 재벌 총수와의 인터뷰를 맡은 부장급이었다. 중요한 면담기사이므로 그는 사진부장과 함께 약속시간을 지켜 총수의 집무실로 갔다. 인터뷰를 잘 끝내자 총수는 ‘관례처럼’ 봉투를 내놓았다. 취재부장은 그 손이 무안하지 않도록 웃으면서 말했다. “회장님, 그 봉투를 받으면 제 목 달아납니다. 주시려면 평생 먹을 만큼 주십시오.” 그 농담에 회장님은 봉투를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은 한국 언론 현장에서는 ‘삽화적인 일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자가 감히 취재원에게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말하며 돈 봉투를 물리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삽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도 언론인의 ‘품격’ 항목이 들어있는 ‘신문윤리실천요강’이 있다. 품격 제1항은 “물질적 정신적임을 막론하고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아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다.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한 기자는 그 자리에서 품격 제1항을 실천했을 뿐이다.
언론은 유혹에 약하다. 언론의 권력이 클수록 유혹의 손도 커진다. 언론 부패의 뿌리는 일제 하의 언론시기부터 커왔다. 그 시절에 이미 언론인은 출입처나 취재원과의 접촉과정에서 금전, 향응, 접대의 유혹에 노출되는 일이 많았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동아일보의 이광수는 신문기자의 직업에 필요한 소양으로 아홉 가지를 소개하는 가운데 술(酒), 여자(色), 돈(金)을 조심하라고 이런 글을 썼다.
“신문기자의 3대기(三大忌)라는 것이 잇으니 그것은 주, 색, 금입니다. 주도, 호색가, 애금가는 반다시 신문을 망치는 기자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주, 색, 금을 따르는 이에게는 정의를 바랄 수 없고 오직 부패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취재원인 ‘각층(各層)’이 언론인을 요정 등에서 환대하며 떠받들고 언론인은 이에 도취하는 수준이었다.
“주시려면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 촌지 거절
언론은 뉴스를 발굴하고 생산하기 위해 각층의 취재원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그 때문에 인식구조가 서로 다른 언론과 취재원은 독립적 관계에서 갈등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양자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유형은 취재원이 언론을 흡수해버리는 경우이다. 이때 언론은 취재원의 완전한 ‘포로’가 되고 만다. 권력과 금권의 포로가 된 언론은 제 역할을 포기한 언론이다.
포로가 된 언론의 유형 가운데 권언유착은 이미 ‘고전적’인 것이 되었다. 작년의 ‘언론대책 문건’ 사태는 권언유착의 전형이었다. 북경에서 연수하고 있던 한 기자가 여당 부총재에게 왜 수상스럽고 음모적인 언론대책 문건을 ‘보고’했는지 아직도 석연히 가려지지 못했다. 이 사태의 두 번째 주역인 한 방송 기자는 ‘예외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당 부총재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에 “…위원장님을 곁에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하는 표현을 썼다고 알려진다. 언론인이 제 발로 정치권력의 포로가 되기를 자청한 모습이었다.
2002년, 새해 벽두부터 천하에 혼돈과 혼탁이 소용돌이친다. 그 한가운데 낀 주역의 하나가 언론이다. ‘패스21’과 얽히고설킨 언론인들의 의혹을 가리켜 한 시사잡지는 언론과 벤처의 ‘신종 불륜’이 생겼다고 풍자했다. 세상이 혼탁할 때면 ‘신음어적(呻吟語摘)’의 경구가 생각난다. 중국 명나라 관리로서 관료의 타락을 개탄한 여곤(呂坤)의 저서 ‘신음어적’을 다시 펼쳐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는 “사람들은 눈에 잘 뜨이는 곳에서만 예의범절의 실행에 힘쓰지 암실(暗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인간의 이중성을 집어냈다. 그래서 여곤은 중국 춘추시대의 큰 도둑 ‘도척’은 차라리 큰 악인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도척’은 겉과 속이 따로 없었고 재물을 훔쳤으되 명예는 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언론, 한번 더 죽었다 살아나 도덕적 힘 얻어야
우리는 고위직 관리와 함께 언론인마저 명예를 거머쥐고도 재물을 탐하다가 연속적으로 비리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면역이 되었다. 집권 말기에 접어든 김대중 대통령은 야윈 뺨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연두기자회견을 했다. 중요한 비리사건을 전담할 특별수사검찰청을 조속히 설치할 것이라고 처방전을 냈으나 만시지탄이다.
언론학 연구자들은 뉴스 생산품은 권력 엘리트라는 진원지를 출발하여 언론 매체의 취재자 및 편집자(이를 ‘게이트키퍼’라고 불렀다)를 거친 다음 뉴스 소비자 앞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뉴스 생산자는 각층의 취재원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양자의 배타적이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거래는 그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언론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인 권력으로 하여금 법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구실이다.
언론은 한번 더 죽었다가 새롭게 살아나 도덕적 힘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평생 먹을 봉투 주시오’라고 말하고 실천한 한 기자의 ‘삽화적 일화’가 ‘일상적인 삶’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안병찬 경원대학교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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