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아버지의 바이올린’] 아무도 묻지 않았던 베트남인 이야기

지역내일 2012-07-20

박순철/칼럼니스트

새물결/정나원 지음/1만2000원

이 책의 제목이 된 '아버지의 바이올린'은 여류 시인 판휘엔뜨의 이야기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출신 성분이 문제돼 철도청의 인쇄공장으로 배치가 되었고, 어머니는 전선에서 인민의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주마간산. 해외여행 뒤에 늘 남는 아쉬움이다. 지난 달 베트남에 다녀온 뒤도 마찬가지였다.

호치민 시, 옛 사이공의 오래된 거리. 첫날 아침 나는 호텔에서 그 유명한 쌀국수를 먹었다. 쇠고기 국물이었다. 맛있었다. 둘째 날 아침도 쌀국수. 이번엔 닭 국물. 역시 맛있었다. 그런데···

"요즘 호텔에서도 아침으로 닭국수가 나온다지? 그거 다 가짜야 가짜. 오리지널은 쇠고기라고, 쇠고기이." 이건 이 책에 나오는, 하노이의 맛집 '호숫가 틴 씨네 국숫집'의 주인장인 틴 노인의 육성이다. 쌀국수 '퍼'(Pho)라는 말이 본래 중국 보따리장수들이 들여온 '펀'(牛肉粉)에서 나온 것이란다.

쌀국수 얘기로 시작했지만 여행이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말이 안 통하는 택시 기사나 시장의 바가지 상인을 대하면서 부풀려진 오해나 안고 귀국해버리기엔 아까운 경험이다. 존 던의 시처럼 인간은 혼자만의 섬이 아니라면 모든 만남은 소중한 것이니까.

이 책의 지은이 정나원씨가 하노이에 한 동안 눌러앉게 된 까닭도 바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령 이런 사람들. "잔돈 100원을 잊어버리고 갔다고 헐떡헐떡 뛰어오던 국숫집 아줌마, 배급제 시절에 밤을 새가며 떡을 주물러 암시장에 팔러 나갔다는 어느 당원 아저씨, 파리로 가려다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 화가 지망생, 냉전 체제의 그늘 속에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시인, 전쟁터에 나갔다가 아직까지도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매일 저녁 밥상에 밥 한 그릇을 같이 올리는 시골 아낙네···"

이 사람들의 이야기, 열한 사람으로 추려진 '만인보'. 지은이는 2년 동안에 걸쳐 이 사람들이 가슴에 묻어놓았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은 그러한 '속내'를 내놓은 글이다. 어떤 공식적인 역사도 밝혀주지 못했던, '아무도 묻지 않았던' 이야기를 베트남인들 스스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한자 한자 기록한 글이다." 그 육성을 우리네 말투로 표현한 시도가 재미있다.

이 책에 목소리를 빌려준 사람들 가운데는 저명한 여류 작가 레밍퀘도 들어있다. 그는 "열여섯의 나이에 마치 소풍을 가듯 정글 속으로 들어가" 4년 동안 삽을 들고 호치민 트레일을 닦는 일에 참가했다. 불발탄들을 캐내는 일도 그 일부였다.

이 일이 끝나자 그는 종군기자가 되어 다시 전선으로 떠났다. "나를 포함해 당시 북부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그 전쟁은 '아름다운 전쟁'이었어요."

전쟁은 끝났다. 그렇지만 무서운 건 전쟁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련들.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가난이었다. 그러다가 도이머이(쇄신) 이후 문단에 활기가 돌던 90년대 초반 그는 '작은 비극'이라는 단편을 발표했다.

토지개혁과 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격동을 거치면서 가족 간의 유대마저 갈가리 찢겨져나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 이 단편은 현대 베트남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글누림'에서 엮어낸 '베트남 단편소설선'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리얼리즘의 정도에서 벗어난 글이라는 비판과 함께 출판 금지 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레밍퀘는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글에서 처음 글을 쓰던 나이가 된 딸에게, 그리고 그 애처럼 이루고 싶은 꿈이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직도 미처 파내지 못한 불발탄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렇지만 젊은 세대의 생각은 다른지도 모른다. 가령 하노이 크리스마스 폭격 당시에 태어난 '72 제너레이션'의 한 명인 응안은 "전쟁 얘기라면 정말이지 신물이 나요"라고 말한다. 그는 말 그대로 방공호에서 태어난 '방공호 출신'이지만 당시 막바지로 치닫던 전쟁의 기억이 전혀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세대는 "성인이 되도록 '한 채널에만 의존한' 사회주의식 교육만을 받다가 구소련이 붕괴한 이후 부지불식간에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 세대이기도 하다."

응안이 대학생이 되던 해 도이머이와 함께 세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배급제가 현금제로 되면서 그와 어머니는 열 가지도 넘는 장사를 동시다발로 벌여야 했다. 단칸방 아파트에서 닭 수십 마리를 키우다 조류독감으로 몰살해 한 달 내내 닭고기로 세 끼를 떼우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졸업 후 외국인투자회사에 취직해 한 달에 아버지 일 년 치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구세대인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나라 팔아먹는 년이 나오다니"하면서 못마땅해 했다.

그는 요즘엔 야생동물 보호와 관련된 국제 환경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바람. "아버지, 이젠 속 그만 끓이시고 맘을 편히 잡수세요. 아버지도 꿈이 있구요, 저도 있어요. 하지만 꿈에는 옳고 그른 게 없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아버지의 바이올린'은 여류 시인 판휘엔뜨의 이야기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 출신 성분이 문제돼 결국 철도청의 인쇄공장으로 배치가 되었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어머니는 전선에서 인민의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아버지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판휘엔뜨는 언젠가는 몸과 마음에 밴 기억들을 재구성해 보고 싶다고, 그래서 "다들 과거의 망령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어느 집에나 서려있는 전쟁의 비극과 갈등의 흔적들. 그래서 그의 시는 거듭남의 꿈을 꾸나보다.

"나는 지금 천둥소리를 듣는다/예언적인 빗줄기를 가져올/거듭남을 꿈꾸는."

나라가 다르다고 사람들도 그처럼 다른 걸까? 쓰는 말이 다르고, 얼굴 모습이 다른 만큼 서로 그렇게 다른 걸까?

글쎄다. 내년쯤엔 베트남 사람들이 '시인의 고향'이라고 부른다는 하노이에 다시 가고 싶다.

호안키엠 호수를 찾아 틴 노인의 국수 맛도 보고 싶고. 10여 년 전 3월엔 그곳 사람들이 '먼지비'라고 부르는 세우(細雨)가 하루 종일 잿빛 장막을 치듯 내렸는데. 인간, 풍경, 그리고 기억의 잔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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