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여민동락공동체 대표
본의 아니게 지자체나 교육원 등의 요청으로 공무원 대상 강의를 자주 한다. 마을공동체와 지역복지 혹은 협동조합 등의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주제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공직사회 내부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이해와 마을만들기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몇 달 뒤 시행될 협동조합법에 대한 갈증이 커진 까닭이다.
강의 때마다 느끼는 것은 공무원들의 역동성과 상상력이 만들어낼 변화 가능성과 기대효과가 그 어느 집단보다도 크다는 점이다. 공무원은 정책집행의 최전선이자 현장행정의 최일선에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무관 공무원 한명이 웬만한 시민단체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크게 과장된 얘기도 아니다. 심지어 거리 조성이나 건물 하나 들어설 때도, 담당 공무원의 예술적 감성에 따라 교도소 같은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고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멋스러운 건물이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공무원은 세상을 바꾸는 의미 있는 '권력'이다. 그것도 공적 권력이다. 단순히 사권력이야 '누리는' 그 무엇이겠지만, 공권력은 주민을 위해 두루 '나눠져야' 할 공적 사명이다. 무엇보다도 공무원은 공무활동가요, 공무노동자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민간영역에서 공익적 활동을 중심으로 주민을 조직하고 주민의 지도력을 키워가며 자유롭게 민간 활동을 한다면, 공무원은 공공영역에서 공무노동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의 사무를 수행하는 공적 활동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은 근엄한 조직의 집단적 객체이기도 하지만, 저마다 가진 창의와 철학으로 공무를 수행해야 하는 창조적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공부하는 공동체'로 진화할 때
바야흐로 공직사회는 조직에 최선의 성실로 헌신하되, 때로 과감하게 의견을 내고 변화를 추동하고 자신의 철학과 실력으로 극복하는 도전과 실험, 시도와 모색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다. 아직도 상명하복이라는 봉건적 공격에 굴복하거나, 여전히 관료사회에서 가장 큰 관심사라 할 승진과 처우의 맹목적 인질로만 산다면 일찌감치 희망은 없다. 그렇게 되면 보장된 정년을 영혼 없이 채워가며 결국 퇴직 때까지 그저 그런 공무원, 생계형 공직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승진과 보상은 성실과 사명을 바탕으로 공무활동의 공적 성과를 평가한 정직한 결산이어야 한다. 정치적 교섭능력과 사교성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실무적 자질과 성실한 사명감, 자신이 발 딛고 사는 공동체와 지역사회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사랑에 바탕한 활동으로 평가받는 게 정당하다. 그래야 공직사회가 바뀌고 공동체가 정상성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다. 그 공권력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정의롭게 나눠지기 위해서는 공직사회가 '공부하는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요즘은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시대다. 담론과 정책과 제도에 대한 '철학'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무리지어 '사유'하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직급이 있고 책임이 있는 상급자들이 주선해서 '학당'을 만들고, '학습동아리'를 지원해야 옳다. 철학하고 사색하고 공부해야 현장의 변화를 이해하고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는 자들이 관료주의가 발호하는 온상이자 그것을 유지하는 동력"이라고 했다. 사유하라, 사유하라, 사유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 시대 공무원들의 율법이어야 한다.
역동적 활동가로 공적책무 다해야
다시 말하지만, 공무활동가인 공무원은 세상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정치적 환경과 조직의 특성과 문화를 이유로 권한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여전히 세상은 극단적인 경쟁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다. 비정규직은 수백만이고, 청년실업은 끝도 없다. 이런 시대에 국가가 정년을 보장하면서 공무원들에게 공무노동을 맡긴 이유는 정치적 외풍에 휩싸이지 않고 세상의 불합리를 공정하게 바꿔가면서 시대 변화의 중심에서 역동적인 활동가로 공적 책무를 다하라는 요청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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