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재 논설고문
절대 권력자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앞에서 그의 허물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조선왕조실록은 반드시 권력자 사후에 편찬되었다. 그 투철한 역사의식을 평가 받아 그 문서는 인류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는가.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말이었다. 40년 가까이 된 이 사건 재심에서 사형 당한 8명의 피고인에게 사법부가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 5년 전 일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사후로 따져도 26년 만이었다.
그 사이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어 2002년에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 공로가 인정되기도 했다. 이만하면 이 사건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이 보통 한국인의 인식이다. 이것을 또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니 사법부 판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독단 아닌가. 보수성향 법관들조차 '재심구조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말'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인식하는 등 역사인식 일천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자료를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8명에게 사형, 15명에게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된 것이 강압과 고문 등에 의한 조작의 결과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피해자들의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은 항소를 포기해 무죄 형이 확정되었다. 법원의 명령에 따라 유가족 등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이루어졌다.
박 후보 인식의 또 한 가지 오류는 2차 인혁당 사건 대법원 판결과 그 사건 재심판결을 별개로 본 점이다. 1차사건과 2차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법부 판결이 둘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1964년 1차사건은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공안조작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중앙정보부 사건처리를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기소를 요구하는 상부지침에 반발해 집단사표를 낸 일이 그 사건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어거지로 기소된 그 사건 재판에서 41명의 피고인 가운데 3명에게만 징역1~3년이 선고되고, 나머지는 무죄 방면되었다. 10년 뒤인 1974년 유신헌법에 저항하는 범국민 운동이 일어나자, 1차사건이 유령처럼 되살아났다. 그 때 처벌받은 도예종 등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민청학련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무려 180여명이나 되는 피고인 가운데 상당수가 군법회의 재판에서 사형 무기징역 등 극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의 형식적인 형 확정 절차가 끝난 지 18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 미명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재판한 민간인 피고인들에게 왜 그렇게 서둘러 형을 집행했는지, 그 이유는 역사에 아무 기록이 없다. 다만 "8명을 죽인 게 제일 큰 실책이었다"고 했다는 고 박 대통령의 말이 고 윤보선 대통령 자택에서 유가족에게 전해진 사실만 널리 회자될 따름이다.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인식한 것이나, 2차사건 본심과 재심을 별개의 사건으로 알고 있는 그의 역사인식은 너무도 무지하고 안이하다. 당 대변인이 공식발표한 '사과의 뜻'을 박 후보가 부정한 것도 그런 인식의 혼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功)이 과(過)가 되고 과가 공이 될 수 없는 게 역사의 평가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12일 밤 큰 짐을 내려놓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박 후보가 아버지 시대에 인권침해 사례가 있었고, 피해자들의 아픔에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는 취지로 언론브리핑을 했다.
박 후보는 이를 부정했다. 그렇게 말한 일이 없다는 말이 전해지자, 당 안팎에서 시끄러운 파열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더니 하루 만에 '유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박 후보 입을 통해 보도되었다. 24시간 사이에 일어난 갈팡질팡 대응을 보면서, 역사 문제까지 표 계산에 결부시키는 정당의 생리와 정치 현실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평가는 한 시대의 결론이다. 공(功)이 과(過)가 되고 과가 공이 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평가다. 아버지의 일이라고 해서 역사적인 평가를 인정하기 미적거리는 사람에게는 '역사에 눈 감은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평가가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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