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언론인
스무 살의 대학생인 루드빅은 한 살 아래인 마르케타를 좋아한다. 그런데 농담을 즐기는 루드빅과 달리 마르케타는 매사에 진지하기만 하다. 그런 마르케타를 답답해하던 루드빅은 당의 교육 연수에 참여한 그녀에게 농담조의 엽서를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분위기는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엽서의 내용이 빌미가 돼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은 웃음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농담 한 마디가 한 젊은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리는 공산독재 국가의 경직성을 그리고 있다.
웬 황당한 일이냐고? 그런데 이런 일들이 지난 1970년대 유신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강원도 산골의 한 농부는 막걸리를 마시고 취중에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박근혜를 김정일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라고 농담을 했다.
그 다음날 그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한 끝에 국보법 위반으로 몇 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출소 뒤 하도 원통해 "술김에 농담한 것 가지고 몇 년씩 징역 살리는 이놈의 세상이 북한보다 나은 게 뭐냐"고 말했다가 다시 끌려가 또 몇 년간 징역을 살아야 했다.
택시에서 술에 취해 한 발언 때문에 구속된 이도 있었고, "정부가 돼먹지 않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말해 징역을 산 사람도 있었다. 체코의 루드빅은 오히려 약과였다. 그는 당에서 쫓겨나고 학업을 중단하는 정도로 그쳤지만 '한국의 루드빅'들은 고문으로 심신이 무너지고 옥살이까지 해야 했다.
취중에 농담했다고 몇년 동안 옥살이
최근 유신시절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인 인혁당 사건에 대한 평가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유신 시절이 끔찍했던 진짜 이유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재앙과 비극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관련 사건 판결문 1412건을 분석해 본 결과, 재야인사들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유언비어 유포'라는 명목으로 처벌당한 비율이 48%에 이르렀다. 그나마 이건 판결문에 한해 정리한 것으로, 입건돼 실제 수사를 받았으나 기소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당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경우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취중에라도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모범적인 국민이 되어야 했고, 우스갯소리를 하더라도 '모범적인' 이웃과 동료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해야 했다. 유신체제가 숨 막혔던 것은 용기 있는 저항을 억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보통 사람들에게 강요한 유신판 '바른 생활'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어린 시절부터 바른 생활을 익히도록 철저히 교육을 받았다.
예컨대 요즘 어린이들이 부르는 발랄한 '숫자 송' 대신 유신 정권 시절 초등학생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1. 일하시는 대통령 2. 이 나라의 지도자 … 5. 오일육 이룩하니 6. 육대주에 빛나고 … 9. 구국의 새 역사는 10. 시월유신 정신으로!"
어른들이 '소외'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지 어른을 위한 노래도 있었다.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에…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대한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 빛나리라 길이 길이 빛나리라"('대통령 찬가').
'바른생활' 익히도록 철저히 교육받아
수많은 대중가요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고는 이런 교육적인 '건전가요'를 들려주었다. 오락물이 변변찮던 시절 그들은 스펙타클한 볼거리까지 제공하는 세심함도 갖췄다. 국가 공식 기념행사에서 '대통령 각하' 카드섹션도 제공됐던 것이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일 잘하는 지도자의 백성으로서' 배곯을 걱정 없는 행복한 삶이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단, 낮이나 밤이나 '불순한' 농담만 자제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당시 어릴 때부터의 철저한 바른 생활 교육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10월 유신 40주년을 앞둔 올해, 그 때의 신민(臣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잖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코믹할 정도다. 이것이야말로 유신이 남긴 진짜 지독한 농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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