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훈/전북대 교수/사회학
요즘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를 살펴보면, 과거 '문교부' 또는 '교육부'의 국정교과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다양해졌고 편집과 제본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다. 교과서의 질이 향상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국정 교과서 중심 체제가 검·인정 교과서 중심 체제로 바뀐 것도 그 중 하나임은 확실하다.
한국의 교과서 정책은 국정과 검·인정 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시대에 따라 그 각각의 비중이 바뀌어 왔다. 과거 국정교과서가 교과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절,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는 '붕어빵'처럼 똑같은 교과서를 사용했고, 대학입학 학력고사 문제도 교과서에서 대부분 출제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학생들은 교과서 내용을 마치 경전처럼 줄치고 외워야 했다.
국정 교과서 중심 체제는 정치권력의 개입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드러냈고,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한 모습을 구현하는 데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각 지방마다 제 각각 다른 내용을 국정교과서를 이용해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인정 교과서 중심 체제는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특히 '2007년 개정 교육과정'으로 국·검·인정 교과서 간의 구성 비율이 크게 변화했다. 국정 교과서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전문교과 일부에만 남았고, 오랫동안 국정 교과서를 유지해온 교과목까지 검정 교과서로 전환되었고, 또 인정 교과서가 크게 늘어났다.
개별 학교에서는 여러 검·인정 교과서들 가운데 하나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학교마다 각기 다른 교과서를 사용해 교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면서 학문과 교육의 전문성과 자율성이 고취되는 효과도 생겨났다.
EBS 수능 교재가 교과서 밀어내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이후, 특히 수능 과목의 고등학교 교과서는 실종되었다.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마다 사용하는 교과서가 다르기 때문에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 문제가 자기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서 출제될 확률이 낮다고 여긴다.
특정 교과서에만 있는 내용을 출제하면, 다른 교과서를 사용해 학습한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에서는 여러 검·인정 교과서를 섭렵해 정리한 참고서(EBS 수능 준비 교재 포함), 또는 교사가 자체 제작한 교재를 교과서처럼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가 EBS 교재와 수능 출제 문제의 연계 비율을 70%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한 이후에는, EBS 수능 교재는 교과서를 대체하고 있다. EBS 수능 교재 가격은 다른 참고서의 50~60% 선으로 저렴하고, EBS 수능방송을 통해 자세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다.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는 자율 학습시간에 EBS 수능방송 비디오를 틀어준다. 결국, 대학 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EBS 수능 교재에 "밑줄 쫙!" 그어가며 공부하고 있다. EBS 교재가 국정 교과서가 된 셈이다.
실제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EBS 수능 교재가 '교과서'고, 검·인정 교과서들은 어느 것이든 '참고서'로 전락해 있다. EBS 교재와 교과서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교사와 학생 모두, 교과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 교과서보다는 교과 내용을 압축해 단순 명료하게 정리한 EBS 교재를 선호한다. "교과서는 사물함에 고이 모셔두었다"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니라 입시제도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형국이다. 검·인정 교과서는 학계와 교육현장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것인데 반해, EBS 수능 교재는 말 교과 내용을 깊이 있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참고서일 뿐이다. 사교육비 잡으려다 교육 100년 대계를 그르치고 있다.
그러한 문제를 잡는다고, 만약 정부에서 "교과서 내용에서 수능 시험문제의 70%를 출제하겠다"고 발표하면 사정은 더 악화될 것이다. 학생들은 여러 권에 이르는 검·인정 교과서들 모두를 학습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난감한 상황을 돌파할 해결책은 무엇일까?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내걸었던 선거 구호를 응용해 대답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교과서가 아니라) 입시제도야, 이 밥통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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