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원/21세기경제학연구소 연구원
1996년 8월 미국의 평론가인 윌리엄 파프는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하는 파격적인 제목의 글을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지에 실었다. '르몽드'는 그가 던진 화두를 놓고 다양한 사람들의 글로 들끓었다. 약 한 달간 계속된 이 연재에는 프랑스의 정치가, 철학자와 학자들이 참가했다.
오늘 한국사회는 26년이라는 까마득한 옛날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이 논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르몽드의 연재는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 화두는 한국사회에서 바로 지금 유효하다.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진보의 시대는 대공황이라는 위기와 맞물린 시기이다. 루즈벨트 '뉴딜'의 본질을 폴 크루그만은 '대압착'이라고 표현했다.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부자들에 대한 최대 79%의 소득세 부과는 미국 사회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60년대 미국사회의 전무후무한 풍요는 그것이 준 선물이었다.
우리나라를 민주주의로 인도한 것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인 6월항쟁이었으나 진보의 시대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뒤를 이은 7, 8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6월항쟁이라는 사회민주화의 틈바구니에서 터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폭발적인 파업과 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근로조건의 개선으로 나타났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도 성장 동력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진보에 대한 치열한 논쟁
프랑스에서 진보적 가치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지던 96년은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가 붕괴한 뒤를 이어 세계적으로 경제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한국사회는 그로부터 1년 후 IMF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6월항쟁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시기였다. 거친 신자유주의의와 함께 휩쓸려간 것은 구조조정과 세계화의 물결 속에 목이 잘리고 터전을 잃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당시 강남의 고급 술집에서는 '이대로'를 외치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건배가 이어졌다.
그 모든 것을 폭력적으로 확대재생산한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명박정권에 와서 신자유주의는 한국사회에서 만개했다. 비정규직은 넘쳐나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고, 재벌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으로 골목상권은 사실상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옛것은 죽고,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빈자리에 괴물들이 나타난다." 진보적 가치는 죽고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것인가.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23번째 사망자의 소식은 그런 심정에 불을 지른다.
그람시 시대의 괴물은 파시즘이었다. 우리 시대의 괴물은, 대다수 사람의 삶을 옭아매는 신자유주의고 이명박으로 대리되는 개발독재다. 이 괴물을 해치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옛것을 대신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일일 것이다. 다가오는 대통령선거는 그 가능성을 시험할 가장 가까운 시금석이다.
21세기의 새로운 가치는?
윌리엄 파프는 '르몽드'지 연재의 최종편을 장식하면서 이렇게 썼다. "견뎌내기 어려운 요구, 비록 종국에는 실패할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계속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미래가 찬란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더 쉬울 터이다."
정권교체를 통해 진보적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투쟁은 의무이면서,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이다. 이번 대선이 괴물 퇴치를 위한 투쟁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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