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학문론’] 노 학자에게 듣는 ‘학문이란 무엇인가’

지역내일 2012-10-26

차미례/언론인·번역가

지식산업사/조동일 지음/2만원

인간이 어떤 도상(圖像)을 그 형태로 인식하게 되는 두뇌의 과정을 탐구한 영국의 위대한 미학자 E.H. 곰브리치는 명저 "예술과 환영"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제대로 보는 법'과 '주어진 양식에 따라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그 책의 다섯째 장인 '공식(formula)과 경험'의 장에서 그는 미술을 가르치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어떤 도식을 제시하고 그것을 충분히 습득케 한 다음 능숙하게 자기 작품의 도상을 그려내게 하는 과정을 지각심리학을 동원해서 분석한다.

그 스승은 한마디로 말해서 '쉽게 그리는 방법'을 체화시키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책의 삽화에는 빅토리아 시대 교실에서 흑판에 스승이 그린 똑바로 선 나뭇잎 한 개의 도상을 수십명의 학생들이 각자 석판 위에 똑같은 나뭇잎으로 모사하는 광경이 나온다. 밑그림을 체본 삼아 이를 그림으로 베끼는 것이다.

'개자원화첩'같은 데 나오는 중국의 전통화론의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종래 우리의 학문 방식과 연구 태도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일반 교육과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 학문은? 학자의 세계는?

학문이 막히면 어떻게 할까?

이 책은 공식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학자의 경험을 이야기 해준다.

학문하는 이유, 자세, 여건, 문제를 말해준다. 한국문학에서 동아시아 문명으로, 유럽 중심주의를 넘어선 세계문학사 연구로 학문적 상상과 탐구의 외연을 넓혀준다.

국문학계에서 최초로 한국 전래의 구비문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여 많은 기념비적인 저작을 내놓았던 조동일 교수의 '학문론'을 앞에 놓고 생뚱맞게 빅토리아조의 그림교육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저자의 학문의 세계와 학자로서의 삶에 대한 경의 때문이다.

저자는 정형화된 도상을 베끼는 방식의 '답습의 학문'을 거부한데서 출발했던 청년 학자시절 이래 편한 날이 없을 만큼 남모를 괴로움과 탄압(?)을 겪으면서도 40여 년간 엄청난 끈기와 독창적 노력으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쏟아냈다. 계명대, 영남대,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교수, 계명대 석좌교수를 거쳐 다시 서울대 명예교수가 되기까지, 그의 학자로서의 노정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까지 한 국문학계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무게와 함께 이제는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다.

국문학을 동아시아 문명 전반에 대한 연구로까지 확장한 그의 저서들은 한국 소설의 이론(1977) 한국문학사상사론(1978) 한국 민요의 전통과 시가율격(1996)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1999) 이 땅에서 학문하기(2000) 한국문학통사1~6(2005) 조동일 창작집(2009)을 비롯해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것만도 무려 22종에 이른다.

요즘 유행의 책 제목들처럼 현란한 수식어가 전혀 없는 단 세 글짜 제목의 '학문론'은 딱딱한 학술이론서는 아니다. 그 보다는 대학생들과의 토론과 질의 응답 방식으로 학문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풀이한 내용(1부)과 '새로운 학문을 위한 방향 전환'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2부), 최근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실제 논문들의 예시(3부)를 저자 특유의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수록했다.

대학은 집인가, 여관인가

저자가 울산대학교에서 2010년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교생을 상대로 강연과 토론을 벌인 중에 나온 중요한 의제들은 특히 국문학 전공학생 뿐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분야 참가자들이 제시한 것들도 많다. 그 1부의 기본적 논의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저자)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다. 그런데 규모가 나날이 커지면서 학문과 멀어지고 있다. 학문에 힘쓰고 학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논하는 학문론까지 강의해야 대학이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거다.

(반론자)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고 취업의 전당이다. 좋은 직장을 얻으려 대학에 다닌다. 대학은 취업률을 자랑한다. 학문은 머리로 하는가, 아니면 가슴으로 하는가

(저자) 과학은 머리로 하고, 학문은 머리와 가슴이 호응해서 한다. 학(學)에서는 머리가, 문(問)에서는 가슴이 더 긴요하지만 머리가 가슴이고 가슴이 머리여야 학문이 제대로 된다.

■(공대생)20~30년 뒤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 때 소용될 공부를 미리 해야겠는데, 어떻게 예견이 가능한가.

남들이 예견한 내용을 배우는 것보다 스스로 예견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전공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예견과 창조능력을 기르는 인문학적 학문 훈련에도 적극 동참해야 한다.

■(국문학도)인문학문이 학문 훈련을 한다고 했는데, 시나 소설을 다루는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문학작품은 이해하기 쉬운 창조물이어서 창조가 무엇인지 경험하고 해명하는데 적극 기여한다. 문학공부는 미감을 기르는데도 필요하다. 창조의 경험과 점검에 특별한 의의를 가지며 학문 훈련에 기여한다.

■ 서울대를 집으로 여겼는가, 여관으로 여겼는가

재직 대학을 집으로 여겨 집을 잘 고치고 학문을 하려면 학문은 다음 생으로 미뤄야한다. 집이 아닌 여관으로 여겼으므로 비바람을 피하는 것만도 다행히 여기며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 학문이 막히면

학문이 제대로 되지 않고 막히는 경우가 흔한 것은 질병의 징후이다. 외부 작용 때문에 학문을 못하면 맞서 싸워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그만두면 된다. 자기는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망치고 있는 경우도 많으므로 스스로 증상을 알아차리고 자신과 싸워 정신을 차려야 치료가 가능하다. 학문의 질병도 학문 연구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학구열은 치유할 단점이 아니라 살려나가야 할 장점이다.

조동일 교수는 또한 상품은 수출하면서 학문은 수입하자고 하는 이 시대의 변화상을 비판하면서 상품도 학문도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국제무대에의 참여를 권하고 있다. 쉬운 대화체로 학문의 숱한 문제를 풀어나가고 해설하는 그의 화법은 청년 제자들에게 철학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몸소 '철학 하며' 정치와 세상사를 풀어나가기를 권했던 고대 철학자들의 대화의 지도법을 연상케 한다.

이 책에서 학문론은 세상과 동떨어진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 경쟁력을 갖추고 산업을 이끌어가기까지 하는 인간정신의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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