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칼럼니스트
엘도라도/폴 크루그먼 지음/예상한 외 엮음/2만원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종 문제라고 생각한다. 남부의 백인들은 병원에서 인종차별이 폐지될까 두려워 국민의료보험에 반대했다.
우문(愚問) 하나.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사회가 바람직한가, 아니면 경제적으로 평등하고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해소된 사회가 바람직한가. 만일 그 답이 자명하다면, 그리고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인간은 왜 어리석은 선택을 되풀이하는가.
폴 크루그먼은 지난 1백여 년 간 미국 역사의 분석을 통해 이 '비합리'의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우선 미국 경제와 정치의 전개 궤적을 두 개의 그래프로 그려보면 흥미로운 일치를 볼 수 있다.
즉 경제 그래프는 처음에 크게 벌어졌던 소득 격차가 중간에 어느 정도 줄었다가 다시 크게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정치 그래프도 비슷하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극화가 초당적 제휴로 완화되더니 다시 심각한 대치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정치학자들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역사는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하나가 되어 일종의 '춤'을 춰왔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이런 2인무를 추도록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크루그먼은 이 책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경제적 불평등이 춤을 주도한다고 믿었다고 밝힌다. 그러니까 변화의 흐름이 경제에서 정치로 흐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나는 상당 부분 원인과 결과가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즉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소득 격차를 확대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 환경이 경제적 불평등을 리드하게 되는 사연을 역사의 굴곡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중산층의 성쇠는 그 핵심적 현상이었다.
우선 경제적 정치적으로 벌어지고, 좁혀지고, 다시 벌어지는 세 시기의 첫 번째 국면, 이른바 도금시대(Gilded Age)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서 묘사되었듯이 탐욕스러운 기업가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판치던 시기였다.
크루그먼은 통념과는 달리 이 불평등과 불만의 시기가 19세기 후반기의 현상이 아니라 192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대공황 이후, 세계대전의 격변을 거치면서 드디어 전후 중산층 사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루그먼은 경제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 전후 중산층 사회는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행정부 정책의 일환인 전시 임금 통제를 통해 몇 년이 안 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도금시대의 불평등에서 비교적 평등한 전후 시대로의 이행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급격한 변화의 산물이었다.
평등은 무엇보다 조세제도의 결과였다. 1920년대에 24%에 머물렀던 소득세의 상한선은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에 79%까지 치솟았고 상속세의 상한선도 77%까지 상승했다. 이렇게 부자의 힘은 위축된 반면 "노조에게 새롭게 부여된 힘이 중산층 중심 사회 탄생의 주요인이" 되었다.
이 평등으로의 '대압착'(Great Compression)은 그 이후 30여 년 간 지속됐다. "이는 제도와 규범, 그리고 정치적 환경이 소득 분배에 끼치는 영향이 우리가 경제학 입문 과정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객관적인 시장의 힘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경제학자라는 사실에서 더욱 주목된다.
그런데 이런 제도와 사회규범의 변화 자체도 정치에 기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크루그먼은 그 대표적 예를 미국의 노조가 몰락한 데서 본다.
정치적 분위기가 노조 탄압 쪽으로 흐르면서 노조가입률이 급락했고 그 결과 소득 불균형을 억제하던 큰 힘이 사라졌다.
정치적 변화를 추동한 것은 무엇보다 공화당의 우경화로 이 세 번 째 시기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었다. 기득권세력이 기도한 공화당의 우경화가 정치적 양극화를 불러오고, 이는 다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미국인들의 여론이 다소나마 진보적인 쪽으로 옮아가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화당이 대중의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경제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선거에서 그렇게 여러 번 승리할 수 있었을까." 크루그먼의 책에 포함된 '거대한 착란을 일으키는 무기'라는 장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그는 우선 토머스 프랭크의 저서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나?'(우리 말 번역본의 제목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보수주의 운동이 낙태금지나 강력한 미국을 위해 투표하라는 식으로 "얼마나 기발하게 감정적인 문제를 이용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위선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루그먼은 미국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종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민감한 문제에 정직하게 맞선다. 재분배를 반대하는 세력은 인종문제가 바탕에 깔린 문구를 사용하여 좌파적 정책을 좌초시켰다.
예컨대 남부의 백인들은 병원에서 인종차별이 폐지될까 두려워 국민의료보험에 반대했다.
"불편한 인종 관계는 분명 미국이 복지국가가 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임에 틀림없다."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게 유권자 각자의 이해득실을 반영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 원시적인 지역감정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미국만의 기현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에도 변화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보수주의가 유권자들을 미혹하기 위해 사용한 대부분의 방법들은 효과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양극화를 완화하고 미국을 중산층 국가로 다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바로 행동을 개시할 때"라고 촉구한다.
사족.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내걸었던 구호,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는 표심을 끌어 모으는 데 큰 몫을 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대구(對句) 하나. "문제는 정치야,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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