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기반 서로 달라 … 칭화대 동문·공직 이력 유사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출신 배경이나 정치적 기반이 뚜렷하게 다르다.
후진타오는 공청단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반면, 시진핑은 태자당 출신이다. 시진핑은 후진타오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유력한 리커창을 따돌리고 대권을 쥐었다. 시진핑의 정치적 배경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쩡칭홍의 태자당으로, 후진타오와 다르다는 점이 향후 국정 운영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관심사다.
중국 정치는 이념과 노선, 또는 정책 대결을 배경으로 했던 파벌투쟁(Factionalism)에서 학연이나 지연, 혈연 쪽으로 갈등 양상이 옮겨가고 있다.
시진핑의 정치적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후진타오와 다른 노선과 정책을 펼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는 많지 않다. 다만 시진핑이 리더십을 관철해 나가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집권 10년 동안 집요하게 육성한 공청단 출신의 정치 지도자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낙관적 시각을 갖고 있는 분석가들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동질성에 주목한다. 1953년 6월생인 시진핑은 1942년 12월생인 후진타오와 11년 차이가 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57세의 나이에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올랐다. 1999년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를 때 겸했던 직책도 거의 비슷하다. 시진핑 직함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등이었다.
공직생활 이력을 보면 후진타오는 시진핑에 비해 출세가 약간 빨랐다. 후진타오는 40세에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및 성의 서기를 거쳐 43세에 당 중앙위원, 50세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반면 시진핑은 44세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된 뒤 47세에 성의 서기, 49세에 중앙위원, 54세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두 사람은 모두 명문 칭화대를 졸업했다. 후진타오는 수리공정학과를 졸업했고, 시진핑은 화공과에서 기본유기합성을 전공한 뒤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 이론 및 사상 정치교육 전공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도 온화하고 신중한 것으로 평가받는 등 공통점이 많다.
후야오방을 정점으로 한 인맥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1977년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으며 최고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오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고, 1982년 총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은 중앙정치국원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보수파 원로들 중 보이보가 후야오방 비판에 가장 앞장섰다.
당시 유일하게 덩샤오핑에 맞서 후야오방을 변호했던 인물이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이를 계기로 시중쉰도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발탁하고 지원한 후견인이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했던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후야오방의 큰아들인 후더핑(胡德平)이다. 1981년 9월 후진타오가 중앙당교 청년 간부반에서 공부할 때 후더핑은 중국역사박물관 부관장으로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천거로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시진핑은 후야오방을 지지한 집안이고,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에게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시진핑이 후진타오와 다른 점은 이념과 노선, 정책 부문이 아니라 통치리더십의 특징과 방식 부문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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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와 시진핑은 출신 배경이나 정치적 기반이 뚜렷하게 다르다.
후진타오는 공청단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반면, 시진핑은 태자당 출신이다. 시진핑은 후진타오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유력한 리커창을 따돌리고 대권을 쥐었다. 시진핑의 정치적 배경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쩡칭홍의 태자당으로, 후진타오와 다르다는 점이 향후 국정 운영에서 어떻게 나타날지 관심사다.
중국 정치는 이념과 노선, 또는 정책 대결을 배경으로 했던 파벌투쟁(Factionalism)에서 학연이나 지연, 혈연 쪽으로 갈등 양상이 옮겨가고 있다.
시진핑의 정치적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후진타오와 다른 노선과 정책을 펼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는 많지 않다. 다만 시진핑이 리더십을 관철해 나가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집권 10년 동안 집요하게 육성한 공청단 출신의 정치 지도자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낙관적 시각을 갖고 있는 분석가들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동질성에 주목한다. 1953년 6월생인 시진핑은 1942년 12월생인 후진타오와 11년 차이가 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57세의 나이에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올랐다. 1999년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를 때 겸했던 직책도 거의 비슷하다. 시진핑 직함은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등이었다.
공직생활 이력을 보면 후진타오는 시진핑에 비해 출세가 약간 빨랐다. 후진타오는 40세에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및 성의 서기를 거쳐 43세에 당 중앙위원, 50세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반면 시진핑은 44세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된 뒤 47세에 성의 서기, 49세에 중앙위원, 54세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두 사람은 모두 명문 칭화대를 졸업했다. 후진타오는 수리공정학과를 졸업했고, 시진핑은 화공과에서 기본유기합성을 전공한 뒤 인문사회학원 마르크스 이론 및 사상 정치교육 전공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두 사람은 성격 면에서도 온화하고 신중한 것으로 평가받는 등 공통점이 많다.
후야오방을 정점으로 한 인맥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후야오방은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1977년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등 요직을 맡으며 최고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오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고, 1982년 총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은 중앙정치국원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보수파 원로들 중 보이보가 후야오방 비판에 가장 앞장섰다.
당시 유일하게 덩샤오핑에 맞서 후야오방을 변호했던 인물이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이를 계기로 시중쉰도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발탁하고 지원한 후견인이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했던 다리 역할을 한 사람이 후야오방의 큰아들인 후더핑(胡德平)이다. 1981년 9월 후진타오가 중앙당교 청년 간부반에서 공부할 때 후더핑은 중국역사박물관 부관장으로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천거로 덩샤오핑의 눈에 들어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시진핑은 후야오방을 지지한 집안이고,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에게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다.
시진핑이 후진타오와 다른 점은 이념과 노선, 정책 부문이 아니라 통치리더십의 특징과 방식 부문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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