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칼럼니스트
흙과 생기/쓰찌다 다까시 지음/김영원 김성순 옮김/ 1만원
생명체들이 공생하면 특정 생물만의 번영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종은 겸허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생공빈의 세계입니다.
책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딘지 진부한 격언을 되뇌는 느낌이 들지만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단지 지은이의 목소리, 녹음된 대사를 듣는 게 아니다. 결국 한 사람의 인격 전체, 생애 전체와 마주 서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진실을 찾고 진실을 알리려는 책이라면 그렇다.
이 책 '공생공빈 21세기를 사는 길'에서 독자와 저자가 만나는 지점은 분명 그런 곳이다. 나는 리 호이나키가 지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무엇보다 그 제목에 끌려 읽은 적이 있는데 공생공빈(共生共貧)을 말하는 쓰찌다 다까시 선생이야말로 분명 그런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는다는 건 그 길을 잠시 동행해보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1970년대 초반 교토 거리에서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가는 젊은 교수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로 '소비는 미덕'으로 들떠있던 시기였으니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든 쓰찌다 선생의 말과 행동이 쉽게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가 미쳤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선각자의 운명, 그대로였다.
그러나 교토대학의 청년 교수를 거리로 내몰았던 것은 깊은 성찰과 고뇌의 결과였다. 도처에서 공해문제가 발생하는 가운데 그는 이런 현상들의 직접적인 원인을 넘어선 지점, 비순환적인 공업문명의 발전 자체가 죄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따져보면 지구가 유한한 것인 이상 자원의 한계, 환경의 한계는 당연한 것이었다. 풍요한 공업문명은 영속할 수가 없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른바 전문가들은 눈먼 이기주의와 찰나주의의 포로였을 따름이다. 학생운동의 와중에서 교수들이 좁은 전문분야에 갇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를 모르는 '전문바보'로 규탄 받으면서 상황은 더욱 명백해졌다. "전문가라고 으스대는 가운데, 약자의 입장에서 산다고 하면서, 고통 받는 피해자의 기분은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바보가 되어 기업이나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생명체는 겸허해야
이렇게 해서 그는 환경운동에 나섰지만 "과학기술사회가 매우 위험하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된다. 이가다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중지 재판이 그것이었다. 국가 측 증인은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사람이었지만 원고인 주민 측 증인으로 나선 쓰찌다 선생은 원자력에 관한 한 비전문가였다. 원자력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들은 대개 연구 상의 이해관계가 있어서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학자는 연구비 후원자에게는 시비를 걸 수 없게 되어 있다. "대학은 지금 급속히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존재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문가는 전문영역의 일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가 대체로 어렵습니다. 유명해지고 지위를 얻으려면 소위 어용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길게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 거듭 말문이 막힌 것은 그 '세계적 권위자'였다. 그 권위에는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원고인 주민 측 승리가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판결은 주민 측의 전면 패소였다.
판결문을 읽어보면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그저 "국가 측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함"이라고 되어 있었다. 쓰찌다 선생은 이것이 "국가 정책에 맞지 않는 일은 사법부에서도 제대로 다루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가다 재판을 통해 그는 "범죄 중의 범죄, 극악한 범죄가 원자력이라고 확인하였습니다."
그날 밤 그는 기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시커먼 파도가 파문을 일으키며 뒤로 흘러가는 광경을 보며 이런 상념에 젖었다. "그 흐름을 보면서 인류의 가는 끝이, 범죄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위기란 것을 예감했습니다. 교토대학 공학부는 이제 그만 둘 수밖에 없다고 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공생의 원리를 부정하는 원자력, 그것을 키우는 과학은 한마디로 '죄과'(罪科)의 학문이었다.
이렇게 현대는 사람이나 생명이 주인인 시대가 아니다. 그는 현대를 민주주의가 아닌 '금주주의'(金主主義)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닌 돈이 주인인 시대, 이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시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 묵시록적인 예언을 내린다. 21세기, 일본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굶주림의 어두운 그림자다.
일본은 현재 공격적 수출로 외화를 벌고 있으나 그 결과 농산물 수입의 외압으로 농업은 망해가고 있다.
경제번영의 끝은 외화의 결핍과 식량수입의 중단이다. 굶주림의 미래를 피할 수 없다면 두려워해도 별 수 없다. 대비가 필요하다. 쓰찌다 선생은 그 실험에 스스로를 던졌다. 그는 단식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열량은 하루 1000 킬로칼로리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궁극적 해답은 자신을 작게 만드는 데 있었다. "한정된 생존의 장에 많은 생명체들이 공생하면 특정 생물만의 번영과 횡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종은 겸허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생공빈의 세계입니다." 그는 폭주하는 상공업문명을 넘어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난을 나누는 길'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 유한한 세계에서 공생공영은 허구다.
다양한 종이 균형을 이뤄야
그에게 공생의 세계는 결코 감상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냉엄한 생존의 마당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생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기에 거기에는 안정이 있다.
한 올 한 올의 약한 실이 짜여 이루어진 직물처럼 서로 얽혀있는 생명의 세계는 강인한 것이다. "특정한 종이 이상(異常) 증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균형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건강하며 안정된 자연의 모습이다." 지속가능한 세계의 참모습이다.
송학의 큰 봉우리 장횡거, 그는 학문의 목표를 이렇게 설정했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운다"(爲天地立心). 내 몸 하나만이 아닌, 온 세상, 온 천지를 위한다는 기개가 거기 있었다. 진리의 길,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참인간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지는 요즘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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