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에 토사구팽 당해, 저우언라이는 생명의 은인 … 경제특구 제안한 개방파·후야오방 정치개혁 지지한 개혁파
지난 2월 13일 '워싱턴포스트'는 시진핑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특집기사를 실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시진핑에게 그의 아버지는 축복만은 아니었다(For China's next leader, such a father is a mixed blessing)"고 썼다. 시중쉰은 시진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저우언라이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비밀문서들을 꼼꼼히 연구한 재미 학자 가오원첸(高文謙)은 "두 명의 시진핑이 있다. 하나는 시중쉰의 개화된 유전자를 가진 시진핑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 유전자를 가진 시진핑이다. 후자가 더욱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자의 영향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시진핑이 1980년대="" 초="" 아버지="" 시중쉰과="" 찍은="" 사진.="" 내일신문="" 자료사진="">
시진핑은 태어나서 9세까지는 좋은 환경 속에 생활했으며 수많은 혜택을 받았다. 1962년 부친이 반당문제로 입건되어 심사를 받기 시작한 뒤 칭화대학교에 입학한 1975년까지 대략 13년 동안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다. 1978년 시중쉰이 활동을 재개해 광둥성 서기를 맡은 후 그가 사망한 2002년까지 24년 동안 그는 부친의 후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시중쉰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항상 2인자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중국 건국초기 시중쉰은 서북지역의 대표주자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복권된 그는 개혁개방의 1번지로 통하는 선전을 경제특구로 만들자고 덩샤오핑에게 처음 제안한 '개방파'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게 정치개혁을 촉구했을 때 그의 편에 선 '개혁파'였다.
◆마오쩌둥의 대장정 지원, 서북지역의 맹주 = 마오쩌둥은 1934년 10월 장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로 퇴각을 결정했다. 이것이 대장정(長征)의 시작이다. 당시 시중쉰은 산시 및 간쑤 일대에 혁명 근거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시중쉰은 오랜 장정으로 피폐해진 홍군을 적극 지원했다. 마오쩌둥은 시중쉰 일행의 도움으로 옌안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고 13년 만에 자금성을 차지했다.
1952년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시중쉰은 중앙선전부장,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의 비서장, 이후 부총리까지 12년 동안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1962년 가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하룻밤 사이에 부총리직을 잃고 추락한다. 시중쉰은 당내외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심사(審査), 구금(拘禁), 감호(監護)를 당했다. 49세에 닥친 시련은, 그가 1978년 활동을 재개해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 제 2서기로 부임한 65세까지 계속되었다.
◆구원의 손길 내민 저우언라이 = 시중쉰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저우언라이이다.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의 보스(Boss)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는 저우언라이 밑에서 10년을 넘게 일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1967년 초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이송해 취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오늘의 시진핑도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지원했지만… = 덩샤오핑은 시중쉰의 개혁개방 구상을 적극 지원해준 후원자였다. 시중쉰은 광둥성에서 당서기로 개혁개방을 주도할 때 홍콩으로 탈출하는 밀항자 대책을 세우면서 경제특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밀항자를 단속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홍콩과 중국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면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단기간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중국의 특정 지역에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이었다.
1982년 중국공산당 제 12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등 원로간부의 은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등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나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 이후 '자산계급 자유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다음해 1월 실각했다. 당시 시중쉰만이 홀로 후야오방을 지지했다. 이로부터 촉발된 불화가 화근이 되어 시중쉰도 1986년 중국공산당 제 13차 당 대회에서 더 이상 정치국원을 맡지 못했으며, 다음해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장쩌민 후진타오 최고 원로로 예우 = 시중쉰은 1990년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광둥성 선전경제특구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선전은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등 최고지도자가 자주 시찰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반드시 시중쉰의 자택을 찾았다.
덩샤오핑과 같은 원로들이 사망한 이후 시중쉰과 보이보 등이 당내에서 가장 관록 있는 원로였기 때문이다. 시중쉰이 1999년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 중국 수뇌부인 장쩌민, 후진타오 등은 최고의 격식을 갖춰 예우했다.
이처럼 중국 최고 지도부가 시중쉰에게 극진하게 예를 다하는 자리에 배석한 시진핑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당시 푸젠성 성장 대리였던 시진핑은 시중쉰의 베이징 방문을 수행해 아버지의 후광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1997년 시진핑은 15기 중국공산당 중앙 후보위원에 당선돼 1999년 8월 푸젠성장 대리에 올랐다. 시중쉰이 1999년 10월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후 다음해 1월 푸젠성장이 되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시진핑이>
지난 2월 13일 '워싱턴포스트'는 시진핑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특집기사를 실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시진핑에게 그의 아버지는 축복만은 아니었다(For China's next leader, such a father is a mixed blessing)"고 썼다. 시중쉰은 시진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저우언라이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비밀문서들을 꼼꼼히 연구한 재미 학자 가오원첸(高文謙)은 "두 명의 시진핑이 있다. 하나는 시중쉰의 개화된 유전자를 가진 시진핑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 유전자를 가진 시진핑이다. 후자가 더욱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자의 영향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시진핑이 1980년대="" 초="" 아버지="" 시중쉰과="" 찍은="" 사진.="" 내일신문="" 자료사진="">
시진핑은 태어나서 9세까지는 좋은 환경 속에 생활했으며 수많은 혜택을 받았다. 1962년 부친이 반당문제로 입건되어 심사를 받기 시작한 뒤 칭화대학교에 입학한 1975년까지 대략 13년 동안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다. 1978년 시중쉰이 활동을 재개해 광둥성 서기를 맡은 후 그가 사망한 2002년까지 24년 동안 그는 부친의 후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시중쉰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항상 2인자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중국 건국초기 시중쉰은 서북지역의 대표주자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복권된 그는 개혁개방의 1번지로 통하는 선전을 경제특구로 만들자고 덩샤오핑에게 처음 제안한 '개방파'다.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에게 정치개혁을 촉구했을 때 그의 편에 선 '개혁파'였다.
◆마오쩌둥의 대장정 지원, 서북지역의 맹주 = 마오쩌둥은 1934년 10월 장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로 퇴각을 결정했다. 이것이 대장정(長征)의 시작이다. 당시 시중쉰은 산시 및 간쑤 일대에 혁명 근거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시중쉰은 오랜 장정으로 피폐해진 홍군을 적극 지원했다. 마오쩌둥은 시중쉰 일행의 도움으로 옌안에 혁명 근거지를 건설하고 13년 만에 자금성을 차지했다.
1952년 마오쩌둥은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시중쉰은 중앙선전부장,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을 맡았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의 비서장, 이후 부총리까지 12년 동안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1962년 가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하룻밤 사이에 부총리직을 잃고 추락한다. 시중쉰은 당내외의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심사(審査), 구금(拘禁), 감호(監護)를 당했다. 49세에 닥친 시련은, 그가 1978년 활동을 재개해 공산당 광둥성 위원회 제 2서기로 부임한 65세까지 계속되었다.
◆구원의 손길 내민 저우언라이 = 시중쉰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저우언라이이다.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의 보스(Boss)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는 저우언라이 밑에서 10년을 넘게 일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1967년 초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을 베이징으로 이송해 취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오늘의 시진핑도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지원했지만… = 덩샤오핑은 시중쉰의 개혁개방 구상을 적극 지원해준 후원자였다. 시중쉰은 광둥성에서 당서기로 개혁개방을 주도할 때 홍콩으로 탈출하는 밀항자 대책을 세우면서 경제특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밀항자를 단속하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홍콩과 중국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면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단기간에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중국의 특정 지역에 해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이었다.
1982년 중국공산당 제 12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으로 승진해 후야오방을 도와 통상업무를 처리했다.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등 원로간부의 은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등 정치개혁을 시도했으나 1986년 대규모 학생시위 이후 '자산계급 자유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다음해 1월 실각했다. 당시 시중쉰만이 홀로 후야오방을 지지했다. 이로부터 촉발된 불화가 화근이 되어 시중쉰도 1986년 중국공산당 제 13차 당 대회에서 더 이상 정치국원을 맡지 못했으며, 다음해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장쩌민 후진타오 최고 원로로 예우 = 시중쉰은 1990년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광둥성 선전경제특구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선전은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등 최고지도자가 자주 시찰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반드시 시중쉰의 자택을 찾았다.
덩샤오핑과 같은 원로들이 사망한 이후 시중쉰과 보이보 등이 당내에서 가장 관록 있는 원로였기 때문이다. 시중쉰이 1999년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 중국 수뇌부인 장쩌민, 후진타오 등은 최고의 격식을 갖춰 예우했다.
이처럼 중국 최고 지도부가 시중쉰에게 극진하게 예를 다하는 자리에 배석한 시진핑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당시 푸젠성 성장 대리였던 시진핑은 시중쉰의 베이징 방문을 수행해 아버지의 후광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1997년 시진핑은 15기 중국공산당 중앙 후보위원에 당선돼 1999년 8월 푸젠성장 대리에 올랐다. 시중쉰이 1999년 10월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후 다음해 1월 푸젠성장이 되었다.
김기수 기자 ks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시진핑이>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