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규모 비밀 항일조직 '대동단' 알리기 노력 … "명망가 중심 독립운동사 인식 벗어날 때"
지난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 기의(起義) 9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80여명의 대동단 운동가 후손 및 학자들이 모인 비교적 오붓한 행사였다.
대동단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키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다. 지역·계층·종교를 아우른 당시 최대규모의 지하조직이었지만 운동가 대부분 평범한 상인, 노동자, 유림 등이었기에 일반인에게는 아직 낯설다.

28일 만난 임재경(사진·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대동단 기념사업회 회장대행은 "명망가들의 이름에 가려 역사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기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 대동단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결성됐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생활인들에 의한 상설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돼 동농 김가진 선생을 비롯해 전협, 최익환, 김찬규 등이 앞장섰다.
중하급 관료, 유림, 학생, 의병, 승려, 여성, 보부상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됐고 단원도 수만명에 달했다.
3·1운동이 선언적이었고 무저항을 표방한 반면 대동단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자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는 2001년부터 창단이 논의돼 이듬해 설립됐고 2003년 보훈처 허가승인을 받았다.
■ 자주독립과 함께 '사회주의'를 거론하고 있다
최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보인다
대동단은 당시 3가지 강령을 만들었다. △조선의 영원한 독립 △세계의 영원한 평화, 그리고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이었다.
임시규칙에 '본단은 사회주의를 철저적으로 시행한다'는 문구가 있다. 사회주의란 말을 강령에 넣은 단체는 처음이다. 일부 간부들은 실제 당시 경찰조서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초기 단계니까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양했다는 의미다.
■결성을 주도한 동농은 사대부에 고위관료였다
대신까지 지낼만큼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복벽(독립 후 임금을 다시 세우는 것)주의자가 아니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일본, 중국 천진 등에서 주재근무를 하면서 세계적인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서출로 30살이 될 때까지 과거조차 보지 못했다. 관직에 오른 것도 서출에게 과거 응시 기회가 부여된 이후의 일이다. 양반이면서도 조선조의 사회적 모순을 깊이 체감했을 거란 얘기다. 동농은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 '의친왕 탈출기도 사건'이 있었다
대동단이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당시 동농은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케 해 외교적인 효과를 얻으려 했다. 의친왕과 동농 등의 이름으로 '제2차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세계의 관심을 고조시킬 계획이었다. 동농이 먼저 임정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연락해 망명했다. 의친왕은 상복차림으로 뒤따라 탈출을 시도했지만 단둥에서 일본경찰에게 붙들리고 만다. 이 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돼 수많은 단원들이 붙잡혔다.
■ 그 외의 주된 활동은
각종 선언문과 진정서, 포고문 등을 인쇄해 배포하고 소식지 '대동신보'를 비밀리에 제작해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단원 대부분이 중산계층이다보니 물적 토대가 없었다.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서 상하이로 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이었다. 일제는 문서, 인쇄 책임자를 비롯해 자금담당, 배포 책임자 등을 모두 체포했고 상당수 단원이 실형을 살았다.
■ 대동단이 근현대사에 갖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는 신채호, 안창호, 김구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있었다. 반면 대동단은 동농 말고는 이렇다 할 명망가 없이 중간계층이 주도했다. 단원 대부분이 이름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지금까지 역사에 묻혀있다.
우리는 명망가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억한다. 역사를 너무 '인격화'한다.
그러나 무명의 시민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배제할 수 없다.
기념사업회는 바로 이들 무명의 시민을 찾고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 앞으로의 계획은
점조직으로 운영되다보니 단원 명단조차 변변하게 없다. 현재까지 이름과 신상이 파악된 사람은 50명에 불과하다. 그마저 후손 가족과 연락 안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을 찾아내는 게 과제다.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근현대사 교육과 관련해 헌법소원도 내려 한다.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정신을 국민에게 전파하려면 임정의 활동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안 되고 있다. '대한민국 이승만 건국'을 알리는 데 바빠서…. 1948년 정부도 중요하지만 법통의 대상은 왜 이야기하지 않나. 정부에 책임이 있다.
■ 왜 11월 27일 기념식을 여나
다음날인 28일은 단원들이 종로 한복판 안국동 네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날이다.
3·1운동 이후 촉각을 세우고 있던 경찰에 의해 일시에 모조리 연행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행 정세용 주간
정리·사진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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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 기의(起義) 9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80여명의 대동단 운동가 후손 및 학자들이 모인 비교적 오붓한 행사였다.
대동단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키 위해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다. 지역·계층·종교를 아우른 당시 최대규모의 지하조직이었지만 운동가 대부분 평범한 상인, 노동자, 유림 등이었기에 일반인에게는 아직 낯설다.

28일 만난 임재경(사진·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대동단 기념사업회 회장대행은 "명망가들의 이름에 가려 역사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기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 대동단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결성됐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생활인들에 의한 상설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돼 동농 김가진 선생을 비롯해 전협, 최익환, 김찬규 등이 앞장섰다.
중하급 관료, 유림, 학생, 의병, 승려, 여성, 보부상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됐고 단원도 수만명에 달했다.
3·1운동이 선언적이었고 무저항을 표방한 반면 대동단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자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는 2001년부터 창단이 논의돼 이듬해 설립됐고 2003년 보훈처 허가승인을 받았다.
■ 자주독립과 함께 '사회주의'를 거론하고 있다
최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보인다
대동단은 당시 3가지 강령을 만들었다. △조선의 영원한 독립 △세계의 영원한 평화, 그리고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이었다.
임시규칙에 '본단은 사회주의를 철저적으로 시행한다'는 문구가 있다. 사회주의란 말을 강령에 넣은 단체는 처음이다. 일부 간부들은 실제 당시 경찰조서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초기 단계니까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양했다는 의미다.
■결성을 주도한 동농은 사대부에 고위관료였다
대신까지 지낼만큼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이었던 건 사실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복벽(독립 후 임금을 다시 세우는 것)주의자가 아니었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일본, 중국 천진 등에서 주재근무를 하면서 세계적인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서출로 30살이 될 때까지 과거조차 보지 못했다. 관직에 오른 것도 서출에게 과거 응시 기회가 부여된 이후의 일이다. 양반이면서도 조선조의 사회적 모순을 깊이 체감했을 거란 얘기다. 동농은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 '의친왕 탈출기도 사건'이 있었다
대동단이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당시 동농은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케 해 외교적인 효과를 얻으려 했다. 의친왕과 동농 등의 이름으로 '제2차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세계의 관심을 고조시킬 계획이었다. 동농이 먼저 임정에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연락해 망명했다. 의친왕은 상복차림으로 뒤따라 탈출을 시도했지만 단둥에서 일본경찰에게 붙들리고 만다. 이 사건으로 조직이 발각돼 수많은 단원들이 붙잡혔다.
■ 그 외의 주된 활동은
각종 선언문과 진정서, 포고문 등을 인쇄해 배포하고 소식지 '대동신보'를 비밀리에 제작해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단원 대부분이 중산계층이다보니 물적 토대가 없었다. 지역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서 상하이로 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엄혹한 시절이었다. 일제는 문서, 인쇄 책임자를 비롯해 자금담당, 배포 책임자 등을 모두 체포했고 상당수 단원이 실형을 살았다.
■ 대동단이 근현대사에 갖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는 신채호, 안창호, 김구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있었다. 반면 대동단은 동농 말고는 이렇다 할 명망가 없이 중간계층이 주도했다. 단원 대부분이 이름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지금까지 역사에 묻혀있다.
우리는 명망가를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기억한다. 역사를 너무 '인격화'한다.
그러나 무명의 시민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를 배제할 수 없다.
기념사업회는 바로 이들 무명의 시민을 찾고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 앞으로의 계획은
점조직으로 운영되다보니 단원 명단조차 변변하게 없다. 현재까지 이름과 신상이 파악된 사람은 50명에 불과하다. 그마저 후손 가족과 연락 안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을 찾아내는 게 과제다.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근현대사 교육과 관련해 헌법소원도 내려 한다. 헌법 전문에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정신을 국민에게 전파하려면 임정의 활동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안 되고 있다. '대한민국 이승만 건국'을 알리는 데 바빠서…. 1948년 정부도 중요하지만 법통의 대상은 왜 이야기하지 않나. 정부에 책임이 있다.
■ 왜 11월 27일 기념식을 여나
다음날인 28일은 단원들이 종로 한복판 안국동 네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날이다.
3·1운동 이후 촉각을 세우고 있던 경찰에 의해 일시에 모조리 연행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행 정세용 주간
정리·사진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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