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출판 돋을새김
홍응명 지음/ 한용운 역해
1만2000원
어느 누가 나무 잎사귀와 채소 뿌리를 씹으며 표주박의 물 한 모금으로도 만족할 수 있겠는가. 어찌 달콤한 술과 기름진 고기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채근담(菜根譚)'은 세상을 살아가는 선비의 몸가짐으로 채소의 뿌리라도 달게 먹을 수 있는 참을성과 기개를 강조한다.
올바른 삶을 유지하려면 세상의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며 그 쓴 맛을 기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흙침대와 돌베개로 지내면서도 높은 꿈을 잃지 않는 여유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검소한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은 더 나아가 "천지를 흔들 만큼 공을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살얼음 위를 밟고 지나가듯 하라"고 가르친다. 품행에 조심성이 없거나 소홀하고 조급하게 움직인다면 낭패만 거듭될 뿐이라는 얘기다. 스스로의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세상을 경륜하는 처세술까지 보여주고 있다.
벼슬자리에 나가서는 두 가지를 지키라고도 타이른다. "오로지 공정하면 현명함을 얻고, 청렴하면 위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벼슬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고 있다. 선비들이 권력이나 탐하고 총애를 받으려 눈치만 살핀다면 감투를 쓴 거렁뱅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말만 앞세우는 세태를 나무라는 것이다.
동양의 명상록인 채근담
채근담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선비인 홍응명(洪應明, 또는 홍자성)이 기록한 인생 지침서다. 유교와 불교, 도교의 사상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어 동양적인 전통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탈무드'라거나 '동양의 명상록'으로 불리며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배경이다.
이 책은 국내에도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소개되어 왔다. 승려로서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던 만해 한용운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진 '정선강의(精選講義) 채근담'이 1917년 신문관에서 처음 출간된 이래 그동안 줄잡아 300종 이상의 번역·해설서가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는 한용운의 해설서를 소개한 것만도 40여종에 이른다. 그의 문장이 한학적 소양에 문학적 깊이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채근담을 강론하는 만해의 문장은 "영웅호걸은 아홉 번 죽어도 열 번째 살아나며, 만 번의 실패에서 오직 한 번 성공하는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뜻을 이룬다"는 식으로 호흡이 강렬하다. "역경을 피하려 하고 순탄한 길만 즐기려는 사람은 겁쟁이거나 비루한 소인배일 뿐"이라고도 질타한다. 당시 일제의 압제 아래 시달리던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채근담은 이러한 번역의 묘미를 떠나서도 원문 자체의 풍미가 단순하고도 은근하다. 마치 풀뿌리를 씹듯이 천천히 씹어야 제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씹을수록 감칠맛도 깊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이 유래된 "사람이 늘 채소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능히 이룰 수 있다(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는 송나라 왕신민(汪信民)의 '소학(小學)'의 구절 그대로다.
상대방에 대한 편협한 생각은 금물
무엇보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생각과 행동이 조신해야 한다는 게 채근담의 기본 가르침이다.
"한 가지 생각이 잘못되면 무릇 백 가지 행동이 잘못된다"며 바다를 건너려는 바람 주머니에 한 군데 구멍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가라앉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들려준다. 행여 사소한 욕심이 스스로 바람 주머니에 구멍을 뚫는 뾰족한 바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실 한 오라기 만큼의 탐욕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비슷한 의미다.
선비의 자세에 대해서도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을 진심을 갖고 있어야만 선비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앞길이 아득하고 막막하다 해서 아침 저녁으로 태도가 바뀐다면 천박한 객기와 비루한 정욕에 불과할 뿐임은 물론이다. 동정(動靜)에 따라 지조가 흔들리고 시끄럽거나 고요한 차이에 따라 달라져서도 곤란하다.
이름만을 내세워 그럴 듯한 말 몇 마디로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릇된 세태에 대한 경종일 것이다.
채근담은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해서는 편협한 생각을 갖지 말도록 권유하고 있다.
좋은 것이든 추한 것이든 모두 공평하게 대접하며 똑똑하고 어리석은 사람 모두에게 도움을 주어야 비로소 덕성스런 도량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맑고 깨끗해서 늘 명경지수 상태를 유지한다면 천하에 미워할 일이 없다"고도 가르친다.
물론 시비곡직을 가릴 때는 조금도 느슨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해득실에 관련되어서는 너무 야박하게 따지지 말라는 얘기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이 현명함이 아니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용맹이 아니다"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따지는 자세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지나치다 보면 이로움만 취하고 손해는 피하는 폐단이 생길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괴로울 때의 구덩이보다는 즐거울 때의 함정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도 환기시켜 준다. 원수가 겨눈 쇠뇌의 화살은 피하기 쉬워도 은혜를 베푼 사람이 옆에서 찌르는 창은 막기 어려운 법이다.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잘난 체하며 상대방을 낮춰 보는 자세도 꾸짖는다. 선행을 베풀었다고 그것을 빙자해 으스대며 사람들을 업신여긴다면 스스로 얼굴을 내려는 욕심일 뿐이라는 얘기다.
청년과 노인들의 사고방식 차이에 대한 관심도 눈길을 끈다. 청년 시절에는 판단이 너무 빠름으로 해서 경솔하지 않은지 걱정해야 하며 노인들은 신중하여 움츠러드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생각이 가벼워 물위에 떠다니는 오리와 같고 나이든 사람들은 오히려 생각이 무거운 탓에 끌채에 매어놓은 망아지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채근담이 바라보는 인생은 대체로 허망한 편이다. 서로 잘났다고 자웅을 겨루지만 부싯돌이 반짝이는 사이에 달팽이 뿔 위에서 스쳐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루의 길고 짧음은 마음에 달려 있다"며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지혜를 가르치기도 한다. 인생은 단 한번의 기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한번쯤 되새겨볼 생활의 교훈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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