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월, 한반도는 뜨거웠다. 판문점에서는 유엔군측과 북한측이 휴전협상 마무리 단계에서 포로교환 문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고 전선에서는 휴전발효 전 한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양측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18일 새벽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거제도를 포함한 전국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북한군 포로중 2만700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버렸다. 명분은 반공포로를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포로 수용소 구조에서 누가 반공이고 누가 친공인지 구별도 어려운 처지였다. 이같은 대통령의 전격적인 석방조치는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 어느 나라와도 사전에 협의된 일없이 이루어졌다.
미국이 경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참전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아침 면도를 하다 이 소식을 보고받고 놀라 면도에 얼굴을 크게 베었다는 일화는 당시 큰 화제가 됐다.
통일없이 휴전이 되는 게 불만이었던 이 대통령은 휴전회담에 한국대표를 내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휴전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반공포로 석방카드를 휘두른 것이다.
여기 케케묵은 얘기를 다시 꺼낸 것은 올해가 휴전 60주년이어서가 아니다. 얼마전 전해들은 얘기가 충격적이어서다. 한국 안보 분야의 고위당국자 한 사람이 지인 몇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명박정부 5년 동안 남북문제가 지나치게 경직됐던 문제가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그 당국자의 답변이 놀라웠다. 미국이 절대로 안된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한 북한에는 어떤 유화조치도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당국자의 답변이 MB정부의 대북정책 결과에 대한 변명으로 미국 핑계를 댄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것이 당국자의 믿음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어서 이 얘기를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일방적 포로 석방도
당시 한국정부의 위상이란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전쟁은 물론 정부운영도 미국원조로 하던 때여서 북측은 한국을 미국의 '괴뢰정부'라고 비판하던 때였다. 그런 환경에서도 이 대통령은 과감하게 일을 강행하며 나라의 체모와 국익을 챙겼다. 이런 외교공세를 통해 휴전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미국이 안된다면 못한다는 게 외교안보 분야 고위인사의 사고방식이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정부 때는 북한이 2006년 핵실험을 했음에도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을 만들어냈다. 10·4선언에 대한 찬반논란과는 별개 문제다.
이렇게 된 건 이 정부가 미국의 '푸들'이란 비야냥을 들어가며 한미동맹에 '올인'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새삼 생각되는 일이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다. 반대세력이 만만치 않아 은밀하게 작업을 해야 했는데 반대의 선봉에 섰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명분은 '나라가 사대(事大)하는 명(明)나라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최만리의 논리와 앞서 언급한 당국자의 말은 얼마나 다른가.
얼마 전 이 난에서 필자는 "2015년 전시작전권 환수를 앞두고 우리의 예비역 장성들이 또 환수해서는 안된다는 데모를 벌이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한국정부는 슬쩍, 미국은 마지못해 수용하는 척 해서 60년 만에 겨우 찾아오기로 한 한미간 합의가 또 유야무야 될 개연성이 없지 않다"고 우려했다. 자칫 필자의 '점괘'가 정말로 현실이 되는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필자는 우리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예비역장성들의 데모가 내년쯤에나 일어나고 그것도 미국대사관이 있는 광화문광장에서 환수반대 피켓을 들고 나서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재향군인회에서 곧 전국민을 상대로 환수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별들의 지모가 필자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할 말은 하는 나라여야 한다
박근혜 당선인의 인수위가 가동된 후 미국측의 대 한국 외교압박이 가시화되고 있다. 미 국무부가 대변인을 통해 미국의 대 북한정책 재검토는 없다고 못을 박았고 한반도정책의 핵심인사라 할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이끄는 정부대표단이 다녀갔다.
비록 개인자격이라고는 하지만 연초 서울에 온 코언 전 미국방장관은 "박근혜정부가 북한에 대해 기존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할 경우 한미 간에 마찰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안된다면 안되는 나라, 미국이 반대해도 할 일은 하는 나라, 어느 것이 정상국가이고 어느 것이 한미관계를 결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인지 박근혜정부는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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