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 칼럼니스트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저작을 보면서 이따금 '그들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다 그들이 표방한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과 달리 표리부동한 삶의 궤적을 발견하곤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뇌물 주고받기의 명수로 단기간에 차장검사에서 대법관에 오를 만큼 명예욕의 화신이었던 프란시스 베이컨,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했던 바람둥이 볼테르, 나폴레옹의 정복욕을 상찬한 간통남 헤겔. 그 정도는 약과다. 자연중심의 교육이념을 설파한 교육소설 '에밀'을 비롯, '인간 불평등 기원론' 등 수다한 걸작을 저술했으면서도, 난잡한 성생활과 아이 다섯을 고아원으로 보낸 장 자크 루소에 이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이자 '자본(Das Kapital)'의 저자로 온 세상을 흔들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삶은 어땠나? 그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저작이 번역돼 나왔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인 피에르 뒤랑이 1970년 발표한 'La vie amoureuse de Karl Mark'이 그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의 삶은, 거의 전 생애가 지독한 궁핍, 걸핏하면 이삿짐을 싸야 했던 유랑, 그리고 이산(離散)을 거듭하는 신산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에겐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요, 자녀들에겐 따사롭고 정겨운 아빠였다. 책은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사자후를 토한 혁명가답지 않게 열정적인 남편이자 자상했던 아빠로 일관했던 '자연인 마르크스'를 들여다 본 전기다. 그래서 책 제목은 원제인 '마르크스의 사랑의 삶'이 더 적확할 것같다.
친가, 외가를 모두 유대교 랍비 가문으로 둔 평민 카를은, 12세 때 고향 트리어의 귀족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의 딸 예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예니는 카를 누나의 친구로 네 살 연상이었다. 그런데 재색을 겸비했다. 당연히 사교계에서 청년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두 사람에겐 신분 차이도, 나이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만이 둘을 감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한 카를이 본과 베를린으로 잇따라 유학을 감에 따라 둘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둘 사이를 더욱 단단히 묶는 계기가 됐다. 1835년 카를과 예니는 비밀 약혼을 했다. 사랑은 더욱 깊어져 갔다. 카를이 베를린대 재학 중이던 1836년 한해에만 무려 3권의 연시집(戀詩集)을 보낼 정도였다. 예니 또한 못지않았다. 카를에 대한 예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서신의 일부.
'오 카를, 당신의 그처럼 아름다운, 그처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처럼 정열적인 사랑, 당신의 그처럼 아름다운 고백이 내 마음을 졸이게 해요. (하략)'
하지만 1837년 카를이 예니와의 결혼 의사를 밝히자 문제가 생긴다. 베스트팔렌 가문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치게 된 것. 예니는 낙담하여 앓아눕고 온천장으로 장기 요양까지 간다. 카를은 예니에게 역사를 공부하라고 주문하고 예니는 카를의 주문에 성실히 따른다.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1841년)를 딴 카를은 본에 정착해 반정부지인 '라인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편집장으로 일한다. 이때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설계자이자 아낌없는 후원자가 될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는 행운을 잡는다.
드디어 1843년 6월 카를과 예니는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속물주의와 질식하게 하는 반동,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을 졸렬하게 탄압하는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신물이 난 카를은, 그해 10월 '독불연보' 발행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간다. 평생을 이어갈 유랑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사랑의 첫 결실(첫딸 예니-엄마와 이름이 같다)이 태어났지만 기쁨도 잠시, 마르크스 가족은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로이센 왕의 요구로 프랑스 정부가 카를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 것.
벨기에에 입국하면서 카를은 어떤 글도 신문에 기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경찰의 감시 또한 삼엄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을 뻔했지만 오래지 않아 엥겔스가 브뤼셀에 합류함으로써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니는 둘째딸 라우라, 첫아들 에드가르를 연년생으로 낳으면서도 카를의 충직한 비서였다. 악필인 카를의 '공산당 선언' 텍스트를 정서해 인쇄소에 넘김으로써 1848년 2월 영국 런던에서 햇빛을 보게 했다.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직후 파리에선 2월 혁명이 일어났다. 브뤼셀에서도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벨기에 정부는 카를 가족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파리의 혁명 상황을 몸으로 체감하던 카를 가족과 엥겔스는 조국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봉기에 합류하기 위해 귀국, 쾰른에서 '신라인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 또한 1년 만에 폐간되고, 카를 가족은 다시 파리로 갔으나 프랑스 정부가 그들을 벽지로 유배하려 하자, 영국 런던에 정착한다.
런던에서의 삶은, 엥겔스의 지속적인 후원에도 불구하고 습관화된 궁핍의 표본이었다. 그것은 자녀의 연이은 사망으로 입증된다. 1849년에 태어난 차남 귀도가 돌 지나 숨지고, 1851년 태어난 셋째딸 프란치스카 역시 1년 만에 사망한다. 장남 에드가르는 9세 되던 1855년에 숨졌다.
그런 불행의 연속 속에서도 카를은 남은 자녀들에게 끔찍한 사랑을 쏟았다. 카를 부부는 아이들에게 전인교육을 시켜주려 애썼다. 문학과 고대사에 흥미를 가진 맏딸 예니에겐 무용과 음악을 배우도록 했고, 시 쓰기를 좋아하고 어학 실력이 출중하며 요리와 스포츠에 자질이 있던 둘째딸 라우라에겐 마술(馬術)을 가르쳤다. 막내딸 엘리아너에겐 아이가 갖고 있는 문학성을 키워 주었다.
심지어 라우라가 성인이 돼 쿠바 출신 의대생과 연애할 때, 사위 후보생에게 결혼과 관련해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설파한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부성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카를의 이 같은 자녀 사랑은 훗날 그대로 그에게 되돌아온다. 예니는 제1인터내셔널 결성 당시 카를을 도왔고, '자본'을 집필할 때도 신문 스크랩과 노트를 준비하고 각주를 다는 등 비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라우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한편, 이들의 문헌을 출판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엘리아너 역시 '자본'의 영역본 출판 때 책임편집을 맡았고, 엥겔스 사후 그가 '뉴욕트리뷴'에 실었던 논문을 모아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추방과 망명으로 궁핍 속 유랑의 삶을 거듭했던 '불온한' 사상가 카를. 하지만 그 속에서 꽃핀 단란한 부부애와 따사로운 가족애는 그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레 / 피에르 뒤랑 지음 / 신대범 옮김 /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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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저작을 보면서 이따금 '그들의 실제 삶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러다 그들이 표방한 거창한 사상이나 철학과 달리 표리부동한 삶의 궤적을 발견하곤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이자 '자본(Das Kapital)'의 저자로 온 세상을 흔들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삶은 어땠나? 그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저작이 번역돼 나왔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인 피에르 뒤랑이 1970년 발표한 'La vie amoureuse de Karl Mark'이 그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의 삶은, 거의 전 생애가 지독한 궁핍, 걸핏하면 이삿짐을 싸야 했던 유랑, 그리고 이산(離散)을 거듭하는 신산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에겐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요, 자녀들에겐 따사롭고 정겨운 아빠였다. 책은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공산당 선언의 사자후를 토한 혁명가답지 않게 열정적인 남편이자 자상했던 아빠로 일관했던 '자연인 마르크스'를 들여다 본 전기다. 그래서 책 제목은 원제인 '마르크스의 사랑의 삶'이 더 적확할 것같다.
친가, 외가를 모두 유대교 랍비 가문으로 둔 평민 카를은, 12세 때 고향 트리어의 귀족 루드비히 폰 베스트팔렌의 딸 예니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예니는 카를 누나의 친구로 네 살 연상이었다. 그런데 재색을 겸비했다. 당연히 사교계에서 청년들로부터 인기가 높았다.
두 사람에겐 신분 차이도, 나이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만이 둘을 감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한 카를이 본과 베를린으로 잇따라 유학을 감에 따라 둘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둘 사이를 더욱 단단히 묶는 계기가 됐다. 1835년 카를과 예니는 비밀 약혼을 했다. 사랑은 더욱 깊어져 갔다. 카를이 베를린대 재학 중이던 1836년 한해에만 무려 3권의 연시집(戀詩集)을 보낼 정도였다. 예니 또한 못지않았다. 카를에 대한 예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보여주는 서신의 일부.
'오 카를, 당신의 그처럼 아름다운, 그처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그처럼 정열적인 사랑, 당신의 그처럼 아름다운 고백이 내 마음을 졸이게 해요. (하략)'
하지만 1837년 카를이 예니와의 결혼 의사를 밝히자 문제가 생긴다. 베스트팔렌 가문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치게 된 것. 예니는 낙담하여 앓아눕고 온천장으로 장기 요양까지 간다. 카를은 예니에게 역사를 공부하라고 주문하고 예니는 카를의 주문에 성실히 따른다.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1841년)를 딴 카를은 본에 정착해 반정부지인 '라인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편집장으로 일한다. 이때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설계자이자 아낌없는 후원자가 될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는 행운을 잡는다.
드디어 1843년 6월 카를과 예니는 결혼에 골인한다. 하지만 속물주의와 질식하게 하는 반동,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을 졸렬하게 탄압하는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신물이 난 카를은, 그해 10월 '독불연보' 발행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간다. 평생을 이어갈 유랑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사랑의 첫 결실(첫딸 예니-엄마와 이름이 같다)이 태어났지만 기쁨도 잠시, 마르크스 가족은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로이센 왕의 요구로 프랑스 정부가 카를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 것.
벨기에에 입국하면서 카를은 어떤 글도 신문에 기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경찰의 감시 또한 삼엄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을 뻔했지만 오래지 않아 엥겔스가 브뤼셀에 합류함으로써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니는 둘째딸 라우라, 첫아들 에드가르를 연년생으로 낳으면서도 카를의 충직한 비서였다. 악필인 카를의 '공산당 선언' 텍스트를 정서해 인쇄소에 넘김으로써 1848년 2월 영국 런던에서 햇빛을 보게 했다.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직후 파리에선 2월 혁명이 일어났다. 브뤼셀에서도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벨기에 정부는 카를 가족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파리의 혁명 상황을 몸으로 체감하던 카를 가족과 엥겔스는 조국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 봉기에 합류하기 위해 귀국, 쾰른에서 '신라인신문'을 창간한다. 이 신문 또한 1년 만에 폐간되고, 카를 가족은 다시 파리로 갔으나 프랑스 정부가 그들을 벽지로 유배하려 하자, 영국 런던에 정착한다.
런던에서의 삶은, 엥겔스의 지속적인 후원에도 불구하고 습관화된 궁핍의 표본이었다. 그것은 자녀의 연이은 사망으로 입증된다. 1849년에 태어난 차남 귀도가 돌 지나 숨지고, 1851년 태어난 셋째딸 프란치스카 역시 1년 만에 사망한다. 장남 에드가르는 9세 되던 1855년에 숨졌다.
그런 불행의 연속 속에서도 카를은 남은 자녀들에게 끔찍한 사랑을 쏟았다. 카를 부부는 아이들에게 전인교육을 시켜주려 애썼다. 문학과 고대사에 흥미를 가진 맏딸 예니에겐 무용과 음악을 배우도록 했고, 시 쓰기를 좋아하고 어학 실력이 출중하며 요리와 스포츠에 자질이 있던 둘째딸 라우라에겐 마술(馬術)을 가르쳤다. 막내딸 엘리아너에겐 아이가 갖고 있는 문학성을 키워 주었다.
심지어 라우라가 성인이 돼 쿠바 출신 의대생과 연애할 때, 사위 후보생에게 결혼과 관련해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설파한 장문의 편지를 보내는 부성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카를의 이 같은 자녀 사랑은 훗날 그대로 그에게 되돌아온다. 예니는 제1인터내셔널 결성 당시 카를을 도왔고, '자본'을 집필할 때도 신문 스크랩과 노트를 준비하고 각주를 다는 등 비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라우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한편, 이들의 문헌을 출판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엘리아너 역시 '자본'의 영역본 출판 때 책임편집을 맡았고, 엥겔스 사후 그가 '뉴욕트리뷴'에 실었던 논문을 모아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이라는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추방과 망명으로 궁핍 속 유랑의 삶을 거듭했던 '불온한' 사상가 카를. 하지만 그 속에서 꽃핀 단란한 부부애와 따사로운 가족애는 그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두레 / 피에르 뒤랑 지음 / 신대범 옮김 /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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