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 지낸 김정렴의 1997년 회고록 주목
청와대 축소·책임장관제·가신 배제 등 서술
박 당선인 벤치마킹 가능성 관심
김정렴(9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지난 1997년 박정희시대를 기록한 '아, 박정희'를 펴냈다. "박 대통령 시책의 공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절실하다"며 낸 책이다.
책 내용의 진위여부를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기장' 안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박근혜시대를 점칠 수 있는 신빙성 높은 잣대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 내용 가운데 박정희청와대의 역할과 활동을 중심으로 박근혜청와대를 전망해봤다.
◆전문성 보완 위한 특보제 = 김 전 비서실장은 책의 1장과 2장에서 자신의 임명과 청와대 비서실 운용에 대해 기술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10월 3선개헌안 통과 직후 개각을 단행했다. 당시는 6·25 이후 최대의 안보위기로 불리던 때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김 전 비서실장에게 "본인은 국방과 안보외교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경제에 눈돌릴 여유가 없으니 비서실장이 경제문제를 대신 잘 챙겨달라"며 임명장을 줬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역할분담을 한 대목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9년3개월간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 전 대통령 통치기간(18년5개월)의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번 일을 맡기면 충분히 시간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김 전 비서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동의 아래 청와대 비서실의 역할과 위상을 변화시켰다. 우선 청와대 비서실을 부처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 아닌 '서비스'하는 조직으로 바꾸려했다. "부처의 애로사항 해결 및 부처간 윤활유 역할에 주력" "총리에 능동적으로 협조" "비서실장은 경제부총리를 적극 지원" 등으로 표현됐다. 김 전 비서실장이 상공부장관 시절 청와대 비서실의 개입으로 업무에 차질을 빚었던 기억을 반영한 대목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청와대 규모와 위상도 대폭 줄였다. △수석 1명과 비서관 10명 감원 △수석을 장·차관급에서 차관으로 낮춰 임명 △공무원 부처복귀 때 특진 금지 △행정관 최소화(9년간 청와대 정원 유지) △명함 금지를 실시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실무화·정예화를 통해 호가호위를 막고 일하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한 특보제도 활용했다. 국내외 정치, 문화, 교육, 경제, 사회 전문가를 특보로 기용해 그들의 전문성을 국정에 반영했다.
청와대에서 가신은 배제됐다. 박 전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있는 비서실 직원은 두세명에 불과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가신들은 하나도 없었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주장했다.
대통령이 여론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창구는 강화됐다. 학계와 언론계 중진들로 이뤄진 '수요회'는 수시로 모여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할 쓴소리를 쏟아냈다. 수요회에서 '남북대화 촉진과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 제의' 같은 아이디어가 건의됐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전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개각에 대한 기억도 되살렸다. "개각 때에는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내무·법무·국방과 무임소장관을 제외한 각 부처 장관에 대해 나에게 복수로 물색해 보라는 분부가 있어서"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이 장관임명 권한을 비서실과 나눴다는 얘기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개각논의 과정에서 민정수석을 배제했다. "경쟁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정보와 첩보가 홍수처럼 밀려들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장관을 임명할 때는 "출신도별 안배도 중요한 고려사항 중 하나였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장관에게 차관이하 인사권을 일임했다고 한다. "과장 이상 차관까지의 발탁·승진의 인사권을 장관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라는 폐단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대통령 면담일정은 대통령 본인에게 맡겨 '인의 장막' 논란을 원천차단했다. 비서실이 대통령 일정에 개입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을 없앤 것이다. 대통령 공식일정에는 비서실장이 원칙적으로 배석했다.
◆일부는 역행 우려도 = 박 당선인은 아버지시대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당선인측 인사는 "김 전 비서실장이 서술한 박정희시대 청와대와 국정운영은 (박 당선인에겐)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 당선인이 대선 직후 내놓은 국정운영 방향에선 박정희시대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박 당선인은 청와대 규모를 줄였다. 기획관 6명과 비서관 10명이 감소됐다. 행정관 30∼40명도 감축될 전망이다. 박 당선인이 꾸렸던 캠프나 인수위는 명함을 만들지 않았다.
책임장관제도 거론된다. 박 당선인은 "국무총리와 부처장관이 책임있게 국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비서실장이 묘사한 △청와대 위상 축소 △특보제 도입·여론청취 활성화 △개각권한 분할 △출신지역 안배 △장관에 인사권 부여 △가신그룹 배제 △공식일정에 비서실장 배석 등을 벤치마킹할 지는 미지수다. 아직 벤치마킹 움직임이 보이질 않거나 일부 역행하는 듯한 모습도 비쳐 우려를 사기도 한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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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축소·책임장관제·가신 배제 등 서술
박 당선인 벤치마킹 가능성 관심
김정렴(9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지난 1997년 박정희시대를 기록한 '아, 박정희'를 펴냈다. "박 대통령 시책의 공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절실하다"며 낸 책이다.

이 책 내용 가운데 박정희청와대의 역할과 활동을 중심으로 박근혜청와대를 전망해봤다.
◆전문성 보완 위한 특보제 = 김 전 비서실장은 책의 1장과 2장에서 자신의 임명과 청와대 비서실 운용에 대해 기술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10월 3선개헌안 통과 직후 개각을 단행했다. 당시는 6·25 이후 최대의 안보위기로 불리던 때였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김 전 비서실장에게 "본인은 국방과 안보외교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경제에 눈돌릴 여유가 없으니 비서실장이 경제문제를 대신 잘 챙겨달라"며 임명장을 줬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역할분담을 한 대목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9년3개월간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 전 대통령 통치기간(18년5개월)의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번 일을 맡기면 충분히 시간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김 전 비서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동의 아래 청와대 비서실의 역할과 위상을 변화시켰다. 우선 청와대 비서실을 부처 위에 '군림'하는 조직이 아닌 '서비스'하는 조직으로 바꾸려했다. "부처의 애로사항 해결 및 부처간 윤활유 역할에 주력" "총리에 능동적으로 협조" "비서실장은 경제부총리를 적극 지원" 등으로 표현됐다. 김 전 비서실장이 상공부장관 시절 청와대 비서실의 개입으로 업무에 차질을 빚었던 기억을 반영한 대목이다.
김 전 비서실장은 청와대 규모와 위상도 대폭 줄였다. △수석 1명과 비서관 10명 감원 △수석을 장·차관급에서 차관으로 낮춰 임명 △공무원 부처복귀 때 특진 금지 △행정관 최소화(9년간 청와대 정원 유지) △명함 금지를 실시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실무화·정예화를 통해 호가호위를 막고 일하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한 특보제도 활용했다. 국내외 정치, 문화, 교육, 경제, 사회 전문가를 특보로 기용해 그들의 전문성을 국정에 반영했다.
청와대에서 가신은 배제됐다. 박 전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있는 비서실 직원은 두세명에 불과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가신들은 하나도 없었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주장했다.
대통령이 여론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창구는 강화됐다. 학계와 언론계 중진들로 이뤄진 '수요회'는 수시로 모여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할 쓴소리를 쏟아냈다. 수요회에서 '남북대화 촉진과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적십자회담 제의' 같은 아이디어가 건의됐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전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개각에 대한 기억도 되살렸다. "개각 때에는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내무·법무·국방과 무임소장관을 제외한 각 부처 장관에 대해 나에게 복수로 물색해 보라는 분부가 있어서"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이 장관임명 권한을 비서실과 나눴다는 얘기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개각논의 과정에서 민정수석을 배제했다. "경쟁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정보와 첩보가 홍수처럼 밀려들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장관을 임명할 때는 "출신도별 안배도 중요한 고려사항 중 하나였다"고 김 전 비서실장은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장관에게 차관이하 인사권을 일임했다고 한다. "과장 이상 차관까지의 발탁·승진의 인사권을 장관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라는 폐단은 일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대통령 면담일정은 대통령 본인에게 맡겨 '인의 장막' 논란을 원천차단했다. 비서실이 대통령 일정에 개입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을 없앤 것이다. 대통령 공식일정에는 비서실장이 원칙적으로 배석했다.
◆일부는 역행 우려도 = 박 당선인은 아버지시대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당선인측 인사는 "김 전 비서실장이 서술한 박정희시대 청와대와 국정운영은 (박 당선인에겐)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 당선인이 대선 직후 내놓은 국정운영 방향에선 박정희시대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박 당선인은 청와대 규모를 줄였다. 기획관 6명과 비서관 10명이 감소됐다. 행정관 30∼40명도 감축될 전망이다. 박 당선인이 꾸렸던 캠프나 인수위는 명함을 만들지 않았다.
책임장관제도 거론된다. 박 당선인은 "국무총리와 부처장관이 책임있게 국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비서실장이 묘사한 △청와대 위상 축소 △특보제 도입·여론청취 활성화 △개각권한 분할 △출신지역 안배 △장관에 인사권 부여 △가신그룹 배제 △공식일정에 비서실장 배석 등을 벤치마킹할 지는 미지수다. 아직 벤치마킹 움직임이 보이질 않거나 일부 역행하는 듯한 모습도 비쳐 우려를 사기도 한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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