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번역가
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성공한 작가'(수전 손탁)란 정평이 있다. 다방면의 재능과 지성에다 기자적 예리함과 비판의 열정까지 갖췄다. 그의 비판 대상은 사회이며 글과 사진의 내용은 세계의 역사, 권력 이동, 심지어 혁명과 역사에 대한 저항까지 담고 있다. 유네스코 사진작가인 장 모르와 함께 펴낸 '제7의 인간' '말하기의 다른 방법'같은 사진-산문집은 세계의 역사, 사회, 경제지리 등 인문학 일반을 절묘하게 글과 사진으로 교차 편집한 저작물들이다.
존 버거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화법이 아니라 사진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림( 영상, 이미지) 자체가 이미 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과 의도를 보여준다는 얘기다. '모습은 응집한다' '모습은 사건을 구분 짓고 동시에 거기에 가담한다'는 그의 '모습의 수수께끼'에 이미 해답은 담겨 있다.
어제 나는 결연하고 분노에 찬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모습과 삼고초려 끝에 모셔온 미래창조과학부 장관후보자가 전격사퇴하며 "정치의 혼란상과 난맥상에 조국을 위해 일하려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국회와 야당을 비난하는 모습을 TV로 보았다. 담화문 내용은 정부 조직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 야당의 책임임을 국민에게 고하며 정면돌파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지만 언사는 옛날에 많이 듣던 포고문에 가깝게 들렸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새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던 모든 일이 원점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답답한 심정은 정치가 뿐 아니라 국민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민을 위해서 이렇게 잘하려고 하는데 국회와 야당이 안 도와준다'며 눈물을 머금고 질타할 일은 아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어떤 식으로 했는지도 국민은 다 보고 있다.
'포고문'과 '난맥상'
인내와 설득이 질타보다 낫다. 국회에서 어떤 쟁점 사항 때문에 여야가 다투는 장면은 민주주의 국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협상-좌절-재협상을 지리하게 거듭하다 '극적 타결'로 진전되는 것을 온갖 정치드라마와 영화를 번역하면서 많이 보았다.
최근 미국도 국가예산이 자동삭감되는 위기의 마감일을 앞두고도 35일 넘게 행정부와 입법부가 막바지 협상을 벌이다 결국 타결에 실패해서 엊그제 850억달러의 자동삭감을 자초하고 말지 않았는가.
그래서 말인데 대통령 담화는 너무 무섭고, 김종훈 장관 후보자의 전격 사퇴는 너무 전격이다. 도망치듯 너무 급히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 실망스럽다. 그 역시 여야 협상의 교착을 의정활동의 한 양상이 아닌 '혼란과 난맥상'으로 보았다는 것도 1등 민주국가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분으로는 조급한 시각처럼 느껴진다. "대통령 '명령'조차 거부하는 야당과 정치권의 난맥상"이란 표현은 원고가 잘못된 것 같다. 오바마도 명령은 하지 않는다. 청와대가 야당에게 청와대 회동을 통보하기 전에 원안고수 의지를 대변인 성명으로 밝힌 저간의 이상 사태를 정확히 관찰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모처럼 '해외 거물급 인재' 대표선수로 금의환향한 케이스였다. 자신의 말대로 박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에 부응해 모든 걸 버리고 귀국했다면 그 모든 걸 되찾으러 박차고 가버리는 대신 조금만 더 기다려 주는 예의는 필요한 게아닌지 참으로 안타깝다.
'정면 돌파'도 부드러웠으면
중국 무협영화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최후의 양자대결 장면에서 한쪽이 '내가 3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이 있다. 번역 오류인데 시간의 3초가 아니라 무술의 3개 초식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 스포츠용어로 풀면 '3차 시기'까지는 대항하지 않겠으니 맘대로 덤벼보라는 얘기다. 연타 공격으로 3번까지 이기지 못한 사람은 달아나야 한다. 아니면 죽는다.
이처럼 고수는 표표히 3번의 공격을 기다려주는 여유와 침착함을 발휘한다. 그것이 왜 무술에서만 있는 일일까. 어느 분야나 달인이 된 사람들은 조급하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하되 공격적으로 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는 인내와 반복, 침착함과 능숙함 속에서 도전하고 발전한다. 내가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다.
정치의 고수와 달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결단력의 강약을 구사해야 할까. 그 시차는 모르겠으나 '말하기의 다른 방법'을 연구하는 데 해답이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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