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목공예 기능을 보유한 한 장인이 나무로 장롱을 짜내는 전과정을 담은 비디오를 보고 그 정교함과 정성에 감탄한 적이 있다. 우리 민족은 생활풍습에 맞게 실용적이면서도 담박하고 견고한 특성을 지닌 나무공예품을 발전시켜왔다.
느티나무, 참중나무, 오리나무, 회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이용해 못질 없이 특이한 이음새로 튼튼한 가구들을 만들어 실생활에 편리한 나무제품들을 이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태리제, 스위스제 같은 서양 가구들에게 우리 안방을 내놓고, 이제는 몇몇 장인들에 의해서만 전승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하는 것이 우리 나무공예의 오늘이다.
나무에 대해선 백과사전
안동에서 남안동 인터체인지를 지나 암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래된 나무들 틈에 둘러싸인 가구점하나를 만나게 된다. 나무향이 은은한 전시장엔 장롱, 의걸이, 반닫이, 이층농, 경상, 바둑판, 촛대 등 각종 가구와 나무제품들을 옛사람들이 만든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이곳의 상호‘양반’처럼 오랫동안 고가구 만을 고집스레 만들어 온 남창환(55)씨. 오래된 나무들 틈에서 살아온 그는 나무에 관한 것이라면 겉모양뿐 아니라, 향취, 색깔, 속성, 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부터 심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라며 나무와 가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는 딸을 시집보낼 때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을 예물로 보낸다는 속설로, 오동나무의 속성을 반영한 이야기다.
오동나무는 촌락근처에서 자라 구하기도 쉽고, 성장속도도 빨라 다 자라면 키가 15m가 넘는다. 나무를 가르면 속 색깔이 부옇기 때문에 가구재료로는 부적절할 법하지만, 이것을 인두로 지지면 나무의 결이 살아나 그 무늬가 참으로 곱다.
불혹 나이로 고가구와 인연
고향인 안동에서 젊은 시절에 15년 넘도록 보르네오가구 대리점을 했던 그가 우리 고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다. 당시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제는 하고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딱 한가지다. 안동댐이 만들어지자 고향이 수몰될 때 고향을 지키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아까워 나무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나무를 팔아 인텔 전축을 사버린 것.
그것이 한이 되었던지, 도로를 넓히면서 베어낸 나무나 태풍에 쓰러진 나무, 옛날 집에서 헐어낸 목재들까지 나무들을 수집해와 이곳 지하창고에는 평생 작품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나무가 그득하다고 한다.
나무 팔아 오디오 산 것 평생 후회
가구점을 오랫동안 운영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먼저 우리가구를 만들 수 있는 목수를 수소문했다. 20년이 넘는 소목경력을 갖고 있는 서정용(44)씨를 찾아내고 청각장애인들을 고용해 소목공으로 길러냈다. 그리고 자신은 목공예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안목을 넓히고, 여러 인간문화재들에게 기술을 배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안동양반고가구는 95년에 동아공예대전 특선, 96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 아홉 차례의 수상경력을 가지게 됐다. 서 목수의 작품이 세 차례, 청각장애인 이재섭(34)씨의 작품이 한차례 상을 받았고 남창환씨 자신도 소품을 출품해서 네 차례의 상을 받았다.
안동대표 관광상품 개발 노력
자신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소목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는 현재 안동에 있는 공예인들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위해 안동공예인협회를 꾸려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98년에 창립전을 열고 안동탈춤페스티벌 때 체험코너를 운영해 안동을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공예품의 우수함을 전하고 있다.
안동이 중요한 관광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요즘이지만, 안동을 대표할 만한 관광문화상품이 없다는 것이 늘 아쉽다. 하회탈이 그중 유명한 것이지만 전국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안동문화를 맛보고 안동을 대표할 만한 문화상품을 고민하던 그는 요즘 각종 문갑, 경대, 소반, 촛대 등 오랫동안 우리 안방과 사랑방에서 옛사람들의 손길을 거쳐온 것들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사람들에게 선사할 계획이다.
이향미 리포터 icebahpool@orgio.net
느티나무, 참중나무, 오리나무, 회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이용해 못질 없이 특이한 이음새로 튼튼한 가구들을 만들어 실생활에 편리한 나무제품들을 이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태리제, 스위스제 같은 서양 가구들에게 우리 안방을 내놓고, 이제는 몇몇 장인들에 의해서만 전승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하는 것이 우리 나무공예의 오늘이다.
나무에 대해선 백과사전
안동에서 남안동 인터체인지를 지나 암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래된 나무들 틈에 둘러싸인 가구점하나를 만나게 된다. 나무향이 은은한 전시장엔 장롱, 의걸이, 반닫이, 이층농, 경상, 바둑판, 촛대 등 각종 가구와 나무제품들을 옛사람들이 만든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이곳의 상호‘양반’처럼 오랫동안 고가구 만을 고집스레 만들어 온 남창환(55)씨. 오래된 나무들 틈에서 살아온 그는 나무에 관한 것이라면 겉모양뿐 아니라, 향취, 색깔, 속성, 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부터 심는다는 이야기가 있지요”라며 나무와 가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는 딸을 시집보낼 때 오동나무로 만든 장롱을 예물로 보낸다는 속설로, 오동나무의 속성을 반영한 이야기다.
오동나무는 촌락근처에서 자라 구하기도 쉽고, 성장속도도 빨라 다 자라면 키가 15m가 넘는다. 나무를 가르면 속 색깔이 부옇기 때문에 가구재료로는 부적절할 법하지만, 이것을 인두로 지지면 나무의 결이 살아나 그 무늬가 참으로 곱다.
불혹 나이로 고가구와 인연
고향인 안동에서 젊은 시절에 15년 넘도록 보르네오가구 대리점을 했던 그가 우리 고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다. 당시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이제는 하고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딱 한가지다. 안동댐이 만들어지자 고향이 수몰될 때 고향을 지키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아까워 나무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나무를 팔아 인텔 전축을 사버린 것.
그것이 한이 되었던지, 도로를 넓히면서 베어낸 나무나 태풍에 쓰러진 나무, 옛날 집에서 헐어낸 목재들까지 나무들을 수집해와 이곳 지하창고에는 평생 작품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나무가 그득하다고 한다.
나무 팔아 오디오 산 것 평생 후회
가구점을 오랫동안 운영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먼저 우리가구를 만들 수 있는 목수를 수소문했다. 20년이 넘는 소목경력을 갖고 있는 서정용(44)씨를 찾아내고 청각장애인들을 고용해 소목공으로 길러냈다. 그리고 자신은 목공예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안목을 넓히고, 여러 인간문화재들에게 기술을 배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안동양반고가구는 95년에 동아공예대전 특선, 96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 아홉 차례의 수상경력을 가지게 됐다. 서 목수의 작품이 세 차례, 청각장애인 이재섭(34)씨의 작품이 한차례 상을 받았고 남창환씨 자신도 소품을 출품해서 네 차례의 상을 받았다.
안동대표 관광상품 개발 노력
자신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소목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는 현재 안동에 있는 공예인들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 위해 안동공예인협회를 꾸려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98년에 창립전을 열고 안동탈춤페스티벌 때 체험코너를 운영해 안동을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공예품의 우수함을 전하고 있다.
안동이 중요한 관광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요즘이지만, 안동을 대표할 만한 관광문화상품이 없다는 것이 늘 아쉽다. 하회탈이 그중 유명한 것이지만 전국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안동문화를 맛보고 안동을 대표할 만한 문화상품을 고민하던 그는 요즘 각종 문갑, 경대, 소반, 촛대 등 오랫동안 우리 안방과 사랑방에서 옛사람들의 손길을 거쳐온 것들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사람들에게 선사할 계획이다.
이향미 리포터 icebahpool@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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