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봉우 편집국장
박근혜정부 출범 후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창조경제, 창조복지, 창조교육, 창조문화…. 정부 각 부처는 모든 정책을 '창조'로 포장한다. 대구시는 사과를 시 상징물로 정하면서 이름을 '창조사과'로 지었단다. 어디 '창조'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새 정부에 딴죽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이명박정부 초기에도 꼭 그랬다. '녹색성장'을 내세우며 하는 일마다 '그린'을 접두사처럼 붙였다. 심지어는 '녹색치안'이라는 구호 아래 경찰서 지구대에 '그린 패트롤'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배치했다.
대통령 어젠다에 대한 집착은 노무현정부나 DJ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권세력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가 규정한 것처럼 대통령 어젠다는 '최고의 권력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잘 조직된 어젠다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법으로 제도화하고 실행하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된다.
'창조 어젠다'가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이유
대통령 어젠다는 보통 시대적 과제를 담는다. 박근혜정부가 몇 년째 선진국 문턱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현재의 벽을 뛰어넘을 키워드로 '창조'를 꼽은 것은 나름 핵심을 짚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제대로만 하면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 아니 '창조DNA 결핍증'에 걸려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선 100여일, 그리고 취임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박근혜정부와 '창조 어젠다'가 몸에 맞지 않은 옷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창조경제를 이끌어 갈 인재라고 야심차게 고른 인사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장관 후보자나 참모들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버벅댄 게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구체적 대안을 담은 창조경제 로드맵을 5월이 돼서야 내놓을 수 있다는 늑장일정 탓만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박 대통령과 각료·참모, 집권여당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에 있다. '일방통행'과 '지시'로 비쳐진 최고 리더십과, 그런 대통령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참모와 각료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창조'와 거리가 멀다. 청와대와 야당 틈바구니에 끼어 갈 길을 잃은 여당에게서 '창조'를 기대하는 것도 난센스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개념설명을 해도 국민들이 무덤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 대통령 어젠다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모든 힘을 동원해 밀어붙이고 각인시켜도 국민은 그냥 '당신들만의 아우성'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 전 대통령이 그렇게 '그린'을 강조했지만 MB정부를 '녹색정부'로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냥 4대강사업으로 상징되는 '토목대통령' '토목공화국'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전 대통령이 임기 중반에 들고 나온 '공정사회' 담론도 마찬가지다. 우군인 보수세력조차 '무엇이 공정이냐'며 뜬금없어 했지만, 임기가 끝난 지금도 국민은 이 전 대통령이 왜 '공정'이라는 의제를 꺼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MB정부의 '녹색' 궤적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MB정부 초반 지구대 앞에 세워져 있던 '그린 패트롤'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슬그머니 치워졌다. 4000여대의 자전거를 사는 데 들였던 6억여원의 돈도 함께 사라졌다.
박 대통령의 '창조 어젠다' 운명은 이와 다를까.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겠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비슷한 궤적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참모·각료, 여당부터 '창조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다. 상명하복 리더십과 70년대식 낡은 통치환경 속에서 창조의 싹이 자랄 수는 없지 않은가.
혹시 밀어붙이기와 구호의 반복만으로 '창조시대'를 열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은 박정희 시절 이미 선진국이 됐어야 했고, 전두환 시절 정의사회가 구현됐어야 했다.
대통령 어젠다가 외면당하면 대통령도 외면받을 수 있다. 우리는 정말 마음을 끌어내는 대통령 어젠다를 만나고 싶다. 박근혜정부도 충분히 '창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남봉우 기자 baw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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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출범 후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창조경제, 창조복지, 창조교육, 창조문화…. 정부 각 부처는 모든 정책을 '창조'로 포장한다. 대구시는 사과를 시 상징물로 정하면서 이름을 '창조사과'로 지었단다. 어디 '창조'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새 정부에 딴죽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이명박정부 초기에도 꼭 그랬다. '녹색성장'을 내세우며 하는 일마다 '그린'을 접두사처럼 붙였다. 심지어는 '녹색치안'이라는 구호 아래 경찰서 지구대에 '그린 패트롤'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배치했다.
대통령 어젠다에 대한 집착은 노무현정부나 DJ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권세력의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가 규정한 것처럼 대통령 어젠다는 '최고의 권력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잘 조직된 어젠다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법으로 제도화하고 실행하는 데 강력한 무기가 된다.
'창조 어젠다'가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이유
대통령 어젠다는 보통 시대적 과제를 담는다. 박근혜정부가 몇 년째 선진국 문턱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현재의 벽을 뛰어넘을 키워드로 '창조'를 꼽은 것은 나름 핵심을 짚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제대로만 하면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 아니 '창조DNA 결핍증'에 걸려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선 100여일, 그리고 취임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박근혜정부와 '창조 어젠다'가 몸에 맞지 않은 옷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창조경제를 이끌어 갈 인재라고 야심차게 고른 인사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장관 후보자나 참모들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버벅댄 게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다. 구체적 대안을 담은 창조경제 로드맵을 5월이 돼서야 내놓을 수 있다는 늑장일정 탓만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박 대통령과 각료·참모, 집권여당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에 있다. '일방통행'과 '지시'로 비쳐진 최고 리더십과, 그런 대통령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참모와 각료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창조'와 거리가 멀다. 청와대와 야당 틈바구니에 끼어 갈 길을 잃은 여당에게서 '창조'를 기대하는 것도 난센스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개념설명을 해도 국민들이 무덤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 대통령 어젠다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 모든 힘을 동원해 밀어붙이고 각인시켜도 국민은 그냥 '당신들만의 아우성'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 전 대통령이 그렇게 '그린'을 강조했지만 MB정부를 '녹색정부'로 생각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냥 4대강사업으로 상징되는 '토목대통령' '토목공화국'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전 대통령이 임기 중반에 들고 나온 '공정사회' 담론도 마찬가지다. 우군인 보수세력조차 '무엇이 공정이냐'며 뜬금없어 했지만, 임기가 끝난 지금도 국민은 이 전 대통령이 왜 '공정'이라는 의제를 꺼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MB정부의 '녹색' 궤적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MB정부 초반 지구대 앞에 세워져 있던 '그린 패트롤'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슬그머니 치워졌다. 4000여대의 자전거를 사는 데 들였던 6억여원의 돈도 함께 사라졌다.
박 대통령의 '창조 어젠다' 운명은 이와 다를까.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겠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비슷한 궤적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참모·각료, 여당부터 '창조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다. 상명하복 리더십과 70년대식 낡은 통치환경 속에서 창조의 싹이 자랄 수는 없지 않은가.
혹시 밀어붙이기와 구호의 반복만으로 '창조시대'를 열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은 박정희 시절 이미 선진국이 됐어야 했고, 전두환 시절 정의사회가 구현됐어야 했다.
대통령 어젠다가 외면당하면 대통령도 외면받을 수 있다. 우리는 정말 마음을 끌어내는 대통령 어젠다를 만나고 싶다. 박근혜정부도 충분히 '창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다.
남봉우 기자 baw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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