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슬픔이여, 안녕] 못 다한 사랑에 대한 회한의 사색

지역내일 2013-06-28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19세때에 쓴 소설제목이다. 슬픔과의 결별이 아니라 슬픔과의 첫 인사라 할까.

이 책을 쓴 언어학자이자 그리스 학자 유재원 교수는 '슬픔이여, 안녕하세요'라는 의미로 앞으로 슬픔을 친숙한 것으로 삼아 매일 인사 나누며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서문에 썼다. 그래서 자신의 책제목도 그렇게 정했단다.

그러나 이 책은 기실 그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던 어떤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존재였던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과정을 꼼꼼이 기록하고 마지막 순간의 슬픔을 자신의 삶의 지분으로 간직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특이하게도 언어학자, 그리스학자이면서 국문학자들보다도 한글학회 표창장을 더 많이 받은 유재원 박사는 인문학분야의 한국 학자로는 보기 드문 새로운 모험정신과 박력넘치는 활동을 보여왔다.

전산언어학에 몰두하여 '한국어 맞춤법 검색기'를 비롯한 한글관련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하고 국어학계에서도 나온적 없던 '순우리말 역순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확실한 후원자이자 동료였던 부인 마은영을 병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을 기록했다는 것은 단순히 사별의 고통을 견디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함께 유학생활을 하고 유럽을 여행하고 모든 것을 철저히 함께 나누던 평생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의 지지대를 발견하려 애쓰는 모습이 간결한 일기체 문장과 그가 인용한 수많은 시(詩)를 통해 읽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그는 "평생 함께했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여행중에 길동무가 훌쩍 떠나는 것처럼 허전한 것"이라고 서두에 썼지만 글에 실린 깊은 상실감과 고통은 그런 정도만이 아니었다.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그리스 아테네 대학교로 유학하여 70년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그리스어와 그리스학을 전공한 저자는 대학 1학년 때 영문학과 신입생 마은영을 만났다.

두 사람은 지금은 거리 이름으로만 남은 동숭동(대학로) 문리대 캠퍼스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귀여운' 커플로 유명했는데 아테네 유학시절 마은영은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의 공부를 해나갔고 함께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의 반려자이기도 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환하게 등불이 켜진 듯한 밝고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외동딸과 '평생 돌봐줘야만 할' 연인, 동료, 남편인 유재원을 남겨두고 201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점점 심해지는 말기암의 고통과 너무도 쇠약해서 마침내 정신까지 혼미해진 입원생활 중에도 그는 끝까지 남편을 걱정했고 늦은 시간에는 집으로 굳이 돌려보내며 오히려 그를 돌봐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암으로 홀연히 떠난 평생의 반려자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던 대학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이재현작)의 주연을 맡았던 마은영을 저자는 수십년째 작중 이름인 '도시꼬'로 부르고 있다. 빛을 뿜어내는 듯한 젊은 날의 낭만과 넉넉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여행과 연구를 함께 했던 그리스 유학생활, 10여년 만에 귀국해서 대학에 자리잡기까지의 어려운 생활이 있었다.

그때 그리스어 강사로, 번역가로, 그리스정교회의 봉사활동가로 어려운 그리스어 경전의 번역과 통역을 맡아 일하며 말없이 견디어준 그녀의 '혼자 강하게, 잘 버티기'에 대한 저자의 회한은 남다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늘은 갑자기 내게 '성프란체스코도 죽기 직전에 헛것을 보았던가?' 하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두었던 카잔자키스의 소설 '성자 프란체스코'를 열어 죽음의 검은 천사가 찾아온 장면을 읽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렇구나 . 그분도 헛것을 보았구나' 했다. 그때 이미 죽음의 검은 천사를 본게 아닐까? 그 안도의 표정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어느 날은 '우린 참 행복하고 즐겁게 산 것 같아. 젊어서 유학도 가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행복했었지' 하고 말했다. 그 표정 뒤에는 이제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예감한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얼마나 허망했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한번은 간병인에게 '처음 가는 길인데다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서 무서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같이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하다."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과 함께
설 명절에 밥먹을 곳도 여의치 않은 때 입원실을 지키던 기억, 묘지를 구해놓고 와서 차마 묏자리를 보고 왔다는 말은 못하고 반가워하는 부인의 통증 앞에서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는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 울고 싶을 때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한국남자 유재원,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그녀에게 감탄하면서도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보통 남편 그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은 부인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세상에 나왔다.

한국·그리스 친선협회장이며 '한국 카잔자키스의 친구들'모임과 '우리 말로 학문하기' 모임을 이끌고 있는 저자는 이미 여러권의 책을 펴냈다. 어릴 때부터 신화를 좋아해서 '그리스 신화의 세계' 연작 3권을 펴냈고 '신화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신화', '그리스: 유재원교수의 그리스, 그리스 신화',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이란 책도 출간한 바 있지만 그 방대한 저작에 비해 '슬픔이여, 안녕'이란 이 작은 책의 무게가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마지막 떠나보낸 부인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녀를 묻고난 뒤에도 마음속으로 대화를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사후 몇 달이 지난 꿈에서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떠드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신기한 것은 꿈속에서도 그게 꿈인걸 알고 저세상 사람인 그녀를 어떻게 제 자리인 그쪽으로 다시 돌려보낼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 깨기도 한다.

여행단을 이끌고 그리스 여행을 하면서도 한곳 한곳에서 젊은 날의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와 대화한다. 실제 상황인 것을 모르고 이 책을 읽는다면 학자인 유재원 교수가 소설가로 데뷔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니 그는 이미 시인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먼저 간 이에게 시를 바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추모라고 믿었다는데 이 책에는 그의 못다한 사랑과 회한의 시와 사색이 가득 넘치도록 실려 있다.

책문
유재원 지음
1만2000원

차미례 칼럼니스트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닫기
(주)내일엘엠씨(이하 '회사'라 함)은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지역내일 미디어 사이트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에 대한 귀하의 동의를 받고자 합니다. 내용을 자세히 읽으신 후 동의 여부를 결정하여 주십시오. [관련법령 개인정보보호법 제15조, 제17조, 제22조, 제23조, 제24조] 회사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중요시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인정보보호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개인정보처리방침을 통하여 회사가 이용자로부터 제공받은 개인정보를 어떠한 용도와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알려드립니다.


1) 수집 방법
지역내일 미디어 기사제보

2)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이용 목적
기사 제보 확인 및 운영

3) 수집 항목
필수 : 이름, 이메일 / 제보내용
선택 : 휴대폰
※인터넷 서비스 이용과정에서 아래 개인정보 항목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수집될 수 있습니다. (IP 주소, 쿠키, MAC 주소, 서비스 이용 기록, 방문 기록, 불량 이용 기록 등)

4) 보유 및 이용기간
① 회사는 정보주체에게 동의 받은 개인정보 보유기간이 경과하거나 개인정보의 처리 목적이 달성된 경우 지체 없이 개인정보를 복구·재생 할 수 없도록 파기합니다. 다만, 다른 법률에 따라 개인정보를 보존하여야 하는 경우에는 해당 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존합니다.
② 처리목적에 따른 개인정보의 보유기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문의 등록일로부터 3개월

※ 관계 법령
이용자의 인터넷 로그 등 로그 기록 / 이용자의 접속자 추적 자료 : 3개월 (통신비밀보호법)

5) 수집 거부의 권리
귀하는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수집 거부 시 문의하기 기능이 제한됩니다.
이름*
휴대폰
이메일*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