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사이 좋게 만드는 의원으로 남겠다”
도의회 이용완 의원
본지는 지방선거 기획시리즈를 통해 출마를 선언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도하고 있다. 이번호부터 전주시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인물을 소개해 나갈 예정이다.
전주시 2선거구는 전주시 신흥 주거지역으로 떠오른 효자 서신 삼천동으로 이뤄졌고 10만명이 훨씬 넘는 대규모 선거구로 웬만한 군 단위 단체장 선거구 보다 큰 곳이다. 현재 현역의원인 이용안 의원을 비롯, 민주당 비례대표로 의회에 진출한 김완자 의원, 전주시의회 박영자 의원, 전 전주시의원 조경철씨 등의 출마가 예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현역 의원인 이용완 의원을 시작으로 출마 예상자들의 소개를 이어갈 계획이다.
<편집자 주="">
그는 유난히 ‘신용과 친구’를 강조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용을 쌓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기도 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 함정을 지나서야 겨우 쌓을 수 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의 찡그린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열에 아홉은 ‘항상 웃는 편한 인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릎이 깨지는 상처’ 한번 없이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그 스스로 “나도 인생의 길에서 무릎이 많이 까져본 사람중의 하나”라고 말할 만큼 우여곡절을 경험해 왔다.
이용완(49세). 광주이씨 집안의 5대 종손으로 2남2녀의 맏이로 남원 덕과면에서 태어났다.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를 나왔다.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던 전주북중에 합격했을 때 순창의 유명한 한학자 였던 외삼촌이 그렇게 좋아하셨다”고 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른바 ‘논다’하는 무협세계(?)를 들락거렸다.
학사장교로 해군에 지원, 대위로 제대한 뒤 당시 유명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3년만에 지점장이 됐다. 88년에는 의약품도매회사인 일성약품㈜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고 1997년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해 전북도의회의원으로 당선, 새천년민주당도지부 대변인을 지내기도 했다.
‘사람 복(福)이 많다’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해 온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 좋은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럽긴 했지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8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후로 가세가 기울었던 일, 해군장교 훈련 18주 도중 첫 면회 날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 바다만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던 일, 자본금과 자재창고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일, 창고에 불이 나 재고 약품을 모두 잃고도 웃어야 했던 일 등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정말 진실하고 성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 안에서 폭넓은 대인관계가 나온다는 것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첫 직장이던 제약회사에서 첫해 연말에 봉급 18만원의 1600%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받았을 때 70만원을 직원들에게 내 놓았다.
“쭈뼛거리는 나를 격려해주고 기를 살려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회사가 부도직전에 몰렸을 때 은행 직원이 먼저 나서 대출을 주선해 주고, 친구들은 주저 없이 보증을 자처했다.
힘든 일이 생겨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할 때, 그의 친구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도울 일이 뭐 없을까”를 먼저 물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도 있었단다. “억울함에 하늘만 쳐다보면서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지만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도 있었다”며 다짐하면서 버텨왔다고 말했다.
‘사람냄새 나는 동네 만들고 싶다’
그는 정치권에 발을 들이며 스스로 ‘사람냄새 나는 도시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자’고 약속했다. 콘크리트 벽으로 칸칸이 단절된 도시생활에서 최소한의 인연마저 잊고 사는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 싶은 게 소망이란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문화와 교육과 창조력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면서 “지방의원이 얼마나 대단한 힘이 있겠는가마는 노력하면 변화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2남2녀의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명제 하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자기 인생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의 연장이다. 지방의원이 시민과 지역에 가족을 대하듯 무한한 사랑을 쏟는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케스트라의 후원회장을 맡고 여러 학교의 지원사업을 벌이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처음 정치에 입문하며 인연을 맺었던 민주당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쳐 보이겠다고 말한다. “내가 성심을 다하면 마음을 얻게 되고 그러면 신의가 싹트는 것 아니겠는가.” 각오를 묻는 질문에 ‘사람과 사람사이를 좋게 하는 그런 의원이 되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편집자>
도의회 이용완 의원
본지는 지방선거 기획시리즈를 통해 출마를 선언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도하고 있다. 이번호부터 전주시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인물을 소개해 나갈 예정이다.
전주시 2선거구는 전주시 신흥 주거지역으로 떠오른 효자 서신 삼천동으로 이뤄졌고 10만명이 훨씬 넘는 대규모 선거구로 웬만한 군 단위 단체장 선거구 보다 큰 곳이다. 현재 현역의원인 이용안 의원을 비롯, 민주당 비례대표로 의회에 진출한 김완자 의원, 전주시의회 박영자 의원, 전 전주시의원 조경철씨 등의 출마가 예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현역 의원인 이용완 의원을 시작으로 출마 예상자들의 소개를 이어갈 계획이다.
<편집자 주="">
그는 유난히 ‘신용과 친구’를 강조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용을 쌓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야 하기도 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 함정을 지나서야 겨우 쌓을 수 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의 찡그린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열에 아홉은 ‘항상 웃는 편한 인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릎이 깨지는 상처’ 한번 없이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그 스스로 “나도 인생의 길에서 무릎이 많이 까져본 사람중의 하나”라고 말할 만큼 우여곡절을 경험해 왔다.
이용완(49세). 광주이씨 집안의 5대 종손으로 2남2녀의 맏이로 남원 덕과면에서 태어났다.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거쳐 전북대를 나왔다.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던 전주북중에 합격했을 때 순창의 유명한 한학자 였던 외삼촌이 그렇게 좋아하셨다”고 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른바 ‘논다’하는 무협세계(?)를 들락거렸다.
학사장교로 해군에 지원, 대위로 제대한 뒤 당시 유명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출발해 3년만에 지점장이 됐다. 88년에는 의약품도매회사인 일성약품㈜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고 1997년에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해 전북도의회의원으로 당선, 새천년민주당도지부 대변인을 지내기도 했다.
‘사람 복(福)이 많다’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해 온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 좋은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럽긴 했지만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8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후로 가세가 기울었던 일, 해군장교 훈련 18주 도중 첫 면회 날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 바다만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던 일, 자본금과 자재창고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던 일, 창고에 불이 나 재고 약품을 모두 잃고도 웃어야 했던 일 등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정말 진실하고 성실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 안에서 폭넓은 대인관계가 나온다는 것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첫 직장이던 제약회사에서 첫해 연말에 봉급 18만원의 1600%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받았을 때 70만원을 직원들에게 내 놓았다.
“쭈뼛거리는 나를 격려해주고 기를 살려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회사가 부도직전에 몰렸을 때 은행 직원이 먼저 나서 대출을 주선해 주고, 친구들은 주저 없이 보증을 자처했다.
힘든 일이 생겨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할 때, 그의 친구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도울 일이 뭐 없을까”를 먼저 물었다.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도 있었단다. “억울함에 하늘만 쳐다보면서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지만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도 있었다”며 다짐하면서 버텨왔다고 말했다.
‘사람냄새 나는 동네 만들고 싶다’
그는 정치권에 발을 들이며 스스로 ‘사람냄새 나는 도시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자’고 약속했다. 콘크리트 벽으로 칸칸이 단절된 도시생활에서 최소한의 인연마저 잊고 사는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 싶은 게 소망이란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문화와 교육과 창조력이 넘치는 도시가 되었으면 한다”면서 “지방의원이 얼마나 대단한 힘이 있겠는가마는 노력하면 변화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2남2녀의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명제 하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자기 인생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의 연장이다. 지방의원이 시민과 지역에 가족을 대하듯 무한한 사랑을 쏟는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케스트라의 후원회장을 맡고 여러 학교의 지원사업을 벌이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처음 정치에 입문하며 인연을 맺었던 민주당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쳐 보이겠다고 말한다. “내가 성심을 다하면 마음을 얻게 되고 그러면 신의가 싹트는 것 아니겠는가.” 각오를 묻는 질문에 ‘사람과 사람사이를 좋게 하는 그런 의원이 되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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