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14호 수용소 탈출' 신동혁씨, '자유 찾아 삼만리' 지현아씨 증언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청문회를 통해 본격적인 북한 인권 유린 실태 조사에 나섰다. 20일 열린 청문회에서 '14호 수용소 탈출'의 주인공 신동혁씨와 '자유 찾아 삼만리'의 저자 지현아씨가 증인으로 나와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전했다.
북한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난 신씨는 자신의 첫번째 기억이 공개처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신씨는 "5살 때 엄마랑 영문도 모르고 어떤 장소에 갔는데 군인이 나무기둥에 사람을 묶는 모습을 봤고 총소리를 들었다"며 "수용소에서는 1년에 2번 공개처형하는데 죄수들을 긴장시키고 무서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식량 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수용소 죄수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는 "숟가락 3~4개 분량의 옥수수밥이 나오는데, 옥수수와 소금에 절인 배추가 (배급식량의) 다였다"며 "풀을 뜯어먹거나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어먹고 쥐도 잡아먹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정치범 수용소 죄수는 북한에서도 죽여야 할 짐승으로 취급된다"며 "수용소에서 살 때 가족이라는 개념을 몰랐고 부모 자식 간의 감정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간수에게 신고하도록 교육받은 그는 어머니와 형이 탈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엿듣고 이를 밀고했다. 어머니와 형은 자신의 신고로 결국 공개처형에 처해졌다. 신씨는 "그게 법이라 간수한테 신고하는 게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 당시 나이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2003년 경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물건을 파손한 벌로 손가락을 잘렸다. 그는 "기물을 파손하면 총살당하거나 팔 다리를 잘릴 수도 있었는데 손가락 하나만 잘려 간수에게 굉장히 감사했다"고 말했다.
두번째 증인인 지씨는 4차례의 탈북과 3차례의 북송을 경험했다. 2번은 자진탈북이었지만 나머지 2번은 인신매매꾼에 속아 국경을 넘었다. 그는 3번이나 북송돼 교화소(감옥) 생활을 하면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지씨는 "북송된 후 감옥생활을 하게 됐는데 감옥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짐승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 눈이 들어가고 많이 쇠약해 짐승으로 보였다"며 "개구리에 소금을 발라 절여 먹고, 메뚜기를 산 채로 잡아먹고, 바닥에 난 풀을 뜯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교화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죄수들이 일주일에 20명씩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보통 교화소 안에서 설사가 나면 다 죽는데 (치료라고는) 옥수수를 불에 태워낸 가루를 먹이는 게 전부"라며 "벌로 흙을 먹은 여동생뻘 되는 죄수도 설사병으로 결국 죽었다"고 말했다.
시신 매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씨는 "5구 들어갈 정도를 파서 거기에 시신 20구를 넣었다"며 "(시신이) 위로 불룩 나오면 여럿이서 발로 밟아 만든 게 묘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주일 뒤에 가보니까 거기에 시체가 없었다"며 "개가 다 먹어서, 개들이 사람 손을 물고 다니고 주변에 머리며 발이며 굴러다녔다"고 말했다.
COI는 20~24일 국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 인권 유린에 대한 내용을 청취하고 2014년 3월 제출할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이다.
박소원 기자 hopepark@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청문회를 통해 본격적인 북한 인권 유린 실태 조사에 나섰다. 20일 열린 청문회에서 '14호 수용소 탈출'의 주인공 신동혁씨와 '자유 찾아 삼만리'의 저자 지현아씨가 증인으로 나와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전했다.
북한에서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태어난 신씨는 자신의 첫번째 기억이 공개처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신씨는 "5살 때 엄마랑 영문도 모르고 어떤 장소에 갔는데 군인이 나무기둥에 사람을 묶는 모습을 봤고 총소리를 들었다"며 "수용소에서는 1년에 2번 공개처형하는데 죄수들을 긴장시키고 무서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식량 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수용소 죄수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는 "숟가락 3~4개 분량의 옥수수밥이 나오는데, 옥수수와 소금에 절인 배추가 (배급식량의) 다였다"며 "풀을 뜯어먹거나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어먹고 쥐도 잡아먹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정치범 수용소 죄수는 북한에서도 죽여야 할 짐승으로 취급된다"며 "수용소에서 살 때 가족이라는 개념을 몰랐고 부모 자식 간의 감정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간수에게 신고하도록 교육받은 그는 어머니와 형이 탈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엿듣고 이를 밀고했다. 어머니와 형은 자신의 신고로 결국 공개처형에 처해졌다. 신씨는 "그게 법이라 간수한테 신고하는 게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 당시 나이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2003년 경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물건을 파손한 벌로 손가락을 잘렸다. 그는 "기물을 파손하면 총살당하거나 팔 다리를 잘릴 수도 있었는데 손가락 하나만 잘려 간수에게 굉장히 감사했다"고 말했다.
두번째 증인인 지씨는 4차례의 탈북과 3차례의 북송을 경험했다. 2번은 자진탈북이었지만 나머지 2번은 인신매매꾼에 속아 국경을 넘었다. 그는 3번이나 북송돼 교화소(감옥) 생활을 하면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했다.
지씨는 "북송된 후 감옥생활을 하게 됐는데 감옥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짐승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 눈이 들어가고 많이 쇠약해 짐승으로 보였다"며 "개구리에 소금을 발라 절여 먹고, 메뚜기를 산 채로 잡아먹고, 바닥에 난 풀을 뜯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교화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죄수들이 일주일에 20명씩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보통 교화소 안에서 설사가 나면 다 죽는데 (치료라고는) 옥수수를 불에 태워낸 가루를 먹이는 게 전부"라며 "벌로 흙을 먹은 여동생뻘 되는 죄수도 설사병으로 결국 죽었다"고 말했다.
시신 매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씨는 "5구 들어갈 정도를 파서 거기에 시신 20구를 넣었다"며 "(시신이) 위로 불룩 나오면 여럿이서 발로 밟아 만든 게 묘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주일 뒤에 가보니까 거기에 시체가 없었다"며 "개가 다 먹어서, 개들이 사람 손을 물고 다니고 주변에 머리며 발이며 굴러다녔다"고 말했다.
COI는 20~24일 국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 인권 유린에 대한 내용을 청취하고 2014년 3월 제출할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이다.
박소원 기자 hopepark@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