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프랑스 대선과 유령의 미소(이환식 2002.04.04)

지역내일 2002-04-08
프랑스 대선과 유령의 미소
이환식 프랑스 외교전략연구원 교수



“그 밥에 그 나물인 대통령 후보”
한국 얘기가 아니다. 4월 21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 유권자들이 보이는 냉소적 반응이다. 현직 대통령과 수상이 유력한 후보로 맞서고 있는 이번 대선이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는 징후는 유권자의 60% 이상이 대선에 관심 없다고 응답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뚜렷이 감지된다. 비록 정치가 조롱대상으로 전락하여 대표성조차 의문시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대선은 국민들의 시선을 묶어두는 최고의 정치 이벤트였다. 그 전통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외적’ 현상을 설명해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선거는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기본 축이다. 80년대이래 프랑스의 ‘정상적’인 정치제도로 둔갑한 소위 ‘좌우 동거정부(Cohabitation)’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의 두 선두주자인 시락과 조스팽이 내세운 공약 속에 좌-우의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다. 사회당 조스팽의 우경화가 빚어낸 결과이다.
97년 좌파의 기치를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했던 조스팽은 이후 5년 동안 동거정부를 이끌며 신자유주의에 맞서기보다는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집권 초기에 노동시간 단축과 청년 고용제 등 반 실업정책을 추진하면서 좌파의 이미지를 지키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스팽의 정책은 노동시간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기 위한 전술에 불과했다.

좌-우 정책 차별성 사라져
아이러니 하게도 조스팽의 좌파정부는 이전의 우파정부보다 더 많은 기업을 민영화하고 불완전 고용을 일반화한 것이다. 이렇듯 집권기간 내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쳐온 조스팽 수상과 전통적 우파인 시락 대통령에게서 유권자가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닌가!
프랑스 대선의 이데올로기적 혼돈은 조스팽이 고용이나 복지 등 전통적 좌파정책을 토대로 우파 시락과 승부하기보다는 우파의 정책으로 알려진 치안확보를 이슈로 내세우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최근 들어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한 치안문제를 내세워 조스팽과의 차별화를 꾀하려던 시락 진영에서 이미 소멸된 좌우 이데올로기 대결구도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유권자에게 외면 당한 대선의 빈곤한 형색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권자를 식상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새 얼굴의 부재이다. 이미 시락과 조스팽은 95년 대선에서 한 차례 격돌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시락이 2년 뒤 정세를 오판,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조스팽에게 화려한 재기의 길을 열어 주었다. 총선에서 패배한 시락은 내각을 좌파에게 넘겨준 채 엘리제궁에서 ‘통치권 없는 대통령’으로 엘리제궁을 지키며 5년 세월을 보냈다. 이들이 재격돌하는 이번 대선은 유권자에게 선택의 의미가 퇴색된 권력게임에 불과한 것이다.
무기력한 프랑스 대선을 그나마 국민적 관심사로 만든 것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좌우파 진영을 초월하여 지지세를 결집하고 있는 ‘시민운동’의 장 삐에르 슈벤느멍 후보와 좌파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라귀에 신드롬’을 조성한 ‘노동자 투쟁’의 아를레트 라귀에 후보이다. 이들은 현재 10~14%를 넘나드는 지지율로 20~24%의 지지율을 보이는 두 선두주자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정치조직의 지지율이 과거 역대선거에서 2~3%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돌풍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슈벤느멍과 라귀에의 급부상은 프랑스 사회에 흐르는 두 가지 기류를 반영한다. 우선 두 후보 모두 신자유주의 질서를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추구하는 질서에 있어 분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조스팽 정부에 내무장관으로 참여했던 슈벤느멍은 코르시카 자치안에 반발하며 조스팽과 결별했다. ‘공화주의’를 화두로 국가권위의 회복을 부르짖는 그의 대선 전략은 신자유주의적 유럽건설 과정에서 프랑스의 정체성 손상을 우려하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것이었다. 그가 좌파에 몸담으며 정치적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드골주의자는 물론 극우진영까지 지지세를 확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러한 슈멘느멍의 성공은 이미 경계가 모호해진 프랑스 대선의 이데올로기 전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반 신자유주의 돌풍 거세
반면 라귀에는 전통적인 좌파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노동자의 삶과 고용의 안정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한다. 연설 서두를 장식하는 ‘노동자 여러분’이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라귀에는 조스팽의 좌파정부를 자본의 아류정권으로 격렬히 비난해왔다. 그녀는 사회당은 물론 좌파정부에 참여한 공산당을 자본의 이해를 충실하게 대변하면서 집단해고와 경제적 해고를 정당화하고 사회적 불평등 심화시킨 사이비 좌파정권으로 규정한다. 좌파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자신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하고 노동자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라귀에의 차별화 전략이 좌파정부에 실망한 유권자들을 결집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두 후보 가운데 하나가 5월 5일 치러질 결선투표에 진출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슈벤느멍과 라귀에로 상징되는 탈 이데올로기 기류와 이데올로기적 전통으로의 회귀라는 상반된 기류가 프랑스 사회에 견고하게 형성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 둘 모두 반 신자유주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기 집권세력에게는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이환식 프랑스 외교전략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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