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전 서울신문 편집국장
정치 공방이 장마보다 더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정치 공방 속에서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튀어 나온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시비의 갈래를 종잡기조차 어려운데 난데없이 데자뷰라니 뜬금없어 보이지만,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데자뷰의 실체를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국정원 기관보고가 지난 5일 국회에서 있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원의 댓글 사건과 관련하여 입을 열었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남 원장의 여러 말은 차치하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 글을 작성한 것은 국정원 직원신분이 아니라 개인신분으로 했지만 부적절했다"는 발언이 귀에 걸린다.
떼로 나쁜짓 해놓고 공적인 자격이 아니라 사적인 자격을 내세워 책임을 피하는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해마다 8월이면 일본 각료들이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각료신분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배했다고 말하곤 한다. 참배할 때 내는 돈을 개인돈으로 냈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침략 피해 국민으로서는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지만 일본 각료들의 둘러대는 말은 매년 되풀이된다. 올해도 그랬다. 하지만 데자뷰 느낌이 발원한 곳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날 있었던 청와대 비서실장 경질 인사가 발원지였다. 신임 비서실장 '김기춘' 하면 생각나는 사건은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1992년 12월 11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와 김영환 부산시장, 우명수 부산시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지구기무부대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회장 등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들이 모였다. 이들은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선거에 적극 개입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나누었다.
초원복국집 사건과 안기부 X파일 사건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 좀 일으켜야 돼." "신문사 간부들 밥 사주면서 좀…" "우리가(경남북이) 남이가."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따위의 말이 오가고 김 실장이 여야 선거운동에 대한 편향적 수사를 검찰도 양해할 것이라는 말을 하자 박 부산경찰청장은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정주영씨가 이끌던 국민당이 개입한 불법도청 결과물인 이들의 말을 자세하게 인용할 생각은 없다. 그냥 봐도 불법 선거개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검찰은 이들의 모임이 사적 성격의 모임이었다며 비켜가기 수사로 일관했다. 김기춘 실장을 비롯한 참석자 중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초원복국집 사건은 또 하나의 사건과 기시감(데자뷰)을 공유한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이다. 초원복국집 사건 수사의 손길은 김 실장 등에 대해서는 호박 넝쿨처럼 부드러웠던 반면 도청 수사에 대해서는 매서웠고 결국 도청에 관련된 정몽준 국민당 의원 등이 법정에 세워졌다. 동아일보가 1992년 12월 22일자에서 '검찰 수사가 기관장 회의보다 도청을 부각하는 인상'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을 정도다.
안기부 X파일 사건에서도 돈을 줬다고 말한 자들, 삼성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검사 등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대신 도청 자료인 X파일 내용을 폭로한 노회찬 의원만 국회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초원복국집 사건 참석자들은 사건 후 안온한 노후를 보냈다. 박일용 부산청장은 승진과 발탁을 거듭해 경찰청장에 이른다. 김 실장도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21세기 한국 정치 무대에서 '왕비서실장'으로 우뚝 섰다.
'벤자민 시계'처럼 거꾸로 가는 청와대
우리 사회에 정의나 염치가 도대체 있는 것일까? 후세들이 20세기 말 21세기 초 한국 사회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쥔 인사들의 그릇된 행동이 되풀이되곤 했다고 전하지 않을까? 기관장들이 모여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충성심 경쟁을 벌인 사건을 진즉 잘 혼냈다면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유사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날인 6일 국무회의에서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면서 반듯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하지만 원칙은 살아있는 권력에 들이대야 신뢰받을 수 있다. 인사는 메시지다.
이번 인사의 메시지는 '청와대의 시계가 벤자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고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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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공방이 장마보다 더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정치 공방 속에서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튀어 나온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시비의 갈래를 종잡기조차 어려운데 난데없이 데자뷰라니 뜬금없어 보이지만,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데자뷰의 실체를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국정원 기관보고가 지난 5일 국회에서 있었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정원 직원의 댓글 사건과 관련하여 입을 열었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남 원장의 여러 말은 차치하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모욕적 글을 작성한 것은 국정원 직원신분이 아니라 개인신분으로 했지만 부적절했다"는 발언이 귀에 걸린다.
떼로 나쁜짓 해놓고 공적인 자격이 아니라 사적인 자격을 내세워 책임을 피하는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해마다 8월이면 일본 각료들이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각료신분이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배했다고 말하곤 한다. 참배할 때 내는 돈을 개인돈으로 냈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침략 피해 국민으로서는 조롱당하는 느낌이 들지만 일본 각료들의 둘러대는 말은 매년 되풀이된다. 올해도 그랬다. 하지만 데자뷰 느낌이 발원한 곳은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날 있었던 청와대 비서실장 경질 인사가 발원지였다. 신임 비서실장 '김기춘' 하면 생각나는 사건은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1992년 12월 11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와 김영환 부산시장, 우명수 부산시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지구기무부대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회장 등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들이 모였다. 이들은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 선거에 적극 개입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나누었다.
초원복국집 사건과 안기부 X파일 사건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 좀 일으켜야 돼." "신문사 간부들 밥 사주면서 좀…" "우리가(경남북이) 남이가."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따위의 말이 오가고 김 실장이 여야 선거운동에 대한 편향적 수사를 검찰도 양해할 것이라는 말을 하자 박 부산경찰청장은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정주영씨가 이끌던 국민당이 개입한 불법도청 결과물인 이들의 말을 자세하게 인용할 생각은 없다. 그냥 봐도 불법 선거개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검찰은 이들의 모임이 사적 성격의 모임이었다며 비켜가기 수사로 일관했다. 김기춘 실장을 비롯한 참석자 중 정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초원복국집 사건은 또 하나의 사건과 기시감(데자뷰)을 공유한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이다. 초원복국집 사건 수사의 손길은 김 실장 등에 대해서는 호박 넝쿨처럼 부드러웠던 반면 도청 수사에 대해서는 매서웠고 결국 도청에 관련된 정몽준 국민당 의원 등이 법정에 세워졌다. 동아일보가 1992년 12월 22일자에서 '검찰 수사가 기관장 회의보다 도청을 부각하는 인상'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을 정도다.
안기부 X파일 사건에서도 돈을 줬다고 말한 자들, 삼성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지목된 검사 등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대신 도청 자료인 X파일 내용을 폭로한 노회찬 의원만 국회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초원복국집 사건 참석자들은 사건 후 안온한 노후를 보냈다. 박일용 부산청장은 승진과 발탁을 거듭해 경찰청장에 이른다. 김 실장도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21세기 한국 정치 무대에서 '왕비서실장'으로 우뚝 섰다.
'벤자민 시계'처럼 거꾸로 가는 청와대
우리 사회에 정의나 염치가 도대체 있는 것일까? 후세들이 20세기 말 21세기 초 한국 사회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쥔 인사들의 그릇된 행동이 되풀이되곤 했다고 전하지 않을까? 기관장들이 모여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충성심 경쟁을 벌인 사건을 진즉 잘 혼냈다면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유사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다음날인 6일 국무회의에서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면서 반듯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하지만 원칙은 살아있는 권력에 들이대야 신뢰받을 수 있다. 인사는 메시지다.
이번 인사의 메시지는 '청와대의 시계가 벤자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고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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