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군부에 의해 축출됐던 휴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4일 약 37시간만에 극적으로 권력에 복귀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군부 일부 세력에 의해 강제 사임당한 뒤 오칠리아 섬에 억류돼 있던 차베스는 이날 새벽 헬기로 수도 카라카스에 재입성, 대통령궁에서 열린 취임식을 통해 다시 ‘현직’ 대통령 자리로 돌아왔다. 취임식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보다 하루 전인 13일 군 특수부대는 차베스 축출 후 계속된 대규모 시위 사태 속에서 자신들이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던 페드로 카르모나를 사임시켰고, 의회는 디오스다도 카베요 부통령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했었다.
그러나 카벨로 부통령은 권한대행직을 수락하면서 차베스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차베스에 대한 연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날 새벽 카라카스에 도착한 차베스는 주먹을 치켜들며 미소를 머금은 채 지지군중 속을 헤치며 대통령궁으로 당당히 입성했다.그는 “베네수엘라는 독재정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뒤 취임식을 갖고 “오늘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축하하고 있다”는 말로 취임 일성을 내보냈다.
같은 시간 대통령궁 바깥에서는 수천명의 지지 시위대가 군 악대의 연주에 맞춰 국가를 부르고 폭죽을 터뜨리는 등 차베스의 대통령직 복귀를 자축했다.
◇베네수엘라 정국 험로=그러나 극적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한 차베스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총파업과 차베스 지지-반대 세력간의 유혈사태, 군부의 분열 등 두동강난 분열상을 치유하고 국가통합을 이뤄내지 못할 경우 차베스의 정치적 앞날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통합과 국제적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차베스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야만 한다. 지난 12일 카라카스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총격사건으로 13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군부는 등을 돌렸었다. 또 국영석유회사 PDVSA에 차베스 지지인물들을 이사로 임명하자 이에 반발한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었다.
반차베스 군부세력에 의해 임시대통령 자리에 오른 페드로 카르모나는 재계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의회 해산’을 명령해 지지기반을 잃고 말았다. 그는 차베스 축출과 임시정부 구성을 주도했던 에프라인 바스케스 군 참모총장의 압력으로 의회해산 결정을 번복하고 말았다.
◇군부지지 확보 불투명=이런 사태의 와중에 차베스를 지지하는 군 병력이 대통령궁을 다시 탈환했고, 수만명의 지지 시위대들이 대통령궁을 에워싼 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군중을 향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쏟아 부으며 진압을 시도하면서 양측간 충돌이 발생, 9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이처럼 혼미한 정국 속에 차베스가 다시 권력에 복귀했지만 에프라인 바스케스 참모총장 등 군부세력이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할 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 98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로 대통령직에 올랐던 차베스는 심각한 정치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위기를 겪어왔다.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을 당시 그는 쿠바로의 망명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 논의를 위해 남미 주요국가 지도자들이 회의를 소집됐지만, 이들은 차베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수부대 장교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한 적이 있는 차베스 대통령이 이번에는 자신을 향한 쿠데타를 좌절시키는 정치적 생존술을 발휘, 극적으로 권력을 탈환했다.
1954년 베네수엘라 서부 농촌 마을에서 학교 교사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82년 볼리바르혁명운동(MBR-200)에 가입해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특수부대 장교 시절인 89년부터 2년간 시몬 볼리바르대 정치학과에서 위탁 교육을 받으면서 현실 정치의 부조리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고 체제 변혁을 모색해 왔다.
결국 그는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힌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난 92년 쿠데타를 감행했으나 실패한뒤 실형 선고를 받고 투옥됐다.
특수부대 특유의 빨간 베레모를 개혁의 상징으로 삼은 그는 98년 대선에 출마, 부패한 정부에 반기를 든 옛 쿠데타 지도자라는 명성과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당선 직후 비상입법기구인 제헌의회를 설치, 헌법 개정을 통해 2000년 7월 실시된 대선에서 60%의 득표율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재선했다.
재선이후 강화된 정치적 기반을 이용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잇따라 시도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과 국영석유회사의 총파업 등에 밀렸다. 또 ‘정실인사’를 단행하는 한편 노동자총연맹마저 어용노조로 대체하려다 결국 중도사퇴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자신을 반대하는 군부 일부 세력에 의해 강제 사임당한 뒤 오칠리아 섬에 억류돼 있던 차베스는 이날 새벽 헬기로 수도 카라카스에 재입성, 대통령궁에서 열린 취임식을 통해 다시 ‘현직’ 대통령 자리로 돌아왔다. 취임식 장면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보다 하루 전인 13일 군 특수부대는 차베스 축출 후 계속된 대규모 시위 사태 속에서 자신들이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던 페드로 카르모나를 사임시켰고, 의회는 디오스다도 카베요 부통령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했었다.
그러나 카벨로 부통령은 권한대행직을 수락하면서 차베스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차베스에 대한 연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날 새벽 카라카스에 도착한 차베스는 주먹을 치켜들며 미소를 머금은 채 지지군중 속을 헤치며 대통령궁으로 당당히 입성했다.그는 “베네수엘라는 독재정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뒤 취임식을 갖고 “오늘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축하하고 있다”는 말로 취임 일성을 내보냈다.
같은 시간 대통령궁 바깥에서는 수천명의 지지 시위대가 군 악대의 연주에 맞춰 국가를 부르고 폭죽을 터뜨리는 등 차베스의 대통령직 복귀를 자축했다.
◇베네수엘라 정국 험로=그러나 극적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한 차베스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총파업과 차베스 지지-반대 세력간의 유혈사태, 군부의 분열 등 두동강난 분열상을 치유하고 국가통합을 이뤄내지 못할 경우 차베스의 정치적 앞날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통합과 국제적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차베스가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해야만 한다. 지난 12일 카라카스에서 벌어진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총격사건으로 13명이 숨진 사건을 계기로 군부는 등을 돌렸었다. 또 국영석유회사 PDVSA에 차베스 지지인물들을 이사로 임명하자 이에 반발한 노조가 총파업에 돌입,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었다.
반차베스 군부세력에 의해 임시대통령 자리에 오른 페드로 카르모나는 재계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의회 해산’을 명령해 지지기반을 잃고 말았다. 그는 차베스 축출과 임시정부 구성을 주도했던 에프라인 바스케스 군 참모총장의 압력으로 의회해산 결정을 번복하고 말았다.
◇군부지지 확보 불투명=이런 사태의 와중에 차베스를 지지하는 군 병력이 대통령궁을 다시 탈환했고, 수만명의 지지 시위대들이 대통령궁을 에워싼 채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시위군중을 향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쏟아 부으며 진압을 시도하면서 양측간 충돌이 발생, 9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이처럼 혼미한 정국 속에 차베스가 다시 권력에 복귀했지만 에프라인 바스케스 참모총장 등 군부세력이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할 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 98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로 대통령직에 올랐던 차베스는 심각한 정치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위기를 겪어왔다.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을 당시 그는 쿠바로의 망명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 논의를 위해 남미 주요국가 지도자들이 회의를 소집됐지만, 이들은 차베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공수부대 장교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한 적이 있는 차베스 대통령이 이번에는 자신을 향한 쿠데타를 좌절시키는 정치적 생존술을 발휘, 극적으로 권력을 탈환했다.
1954년 베네수엘라 서부 농촌 마을에서 학교 교사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82년 볼리바르혁명운동(MBR-200)에 가입해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특수부대 장교 시절인 89년부터 2년간 시몬 볼리바르대 정치학과에서 위탁 교육을 받으면서 현실 정치의 부조리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고 체제 변혁을 모색해 왔다.
결국 그는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힌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난 92년 쿠데타를 감행했으나 실패한뒤 실형 선고를 받고 투옥됐다.
특수부대 특유의 빨간 베레모를 개혁의 상징으로 삼은 그는 98년 대선에 출마, 부패한 정부에 반기를 든 옛 쿠데타 지도자라는 명성과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당선 직후 비상입법기구인 제헌의회를 설치, 헌법 개정을 통해 2000년 7월 실시된 대선에서 60%의 득표율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재선했다.
재선이후 강화된 정치적 기반을 이용해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잇따라 시도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과 국영석유회사의 총파업 등에 밀렸다. 또 ‘정실인사’를 단행하는 한편 노동자총연맹마저 어용노조로 대체하려다 결국 중도사퇴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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