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당시 22살)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이 땅에도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사업회’는 이날 오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30주기 추도식을 열고 열사의 뜻을 기렸다. 민주노총은 전날 서울 대학로에서 노동자 시민 학생 등 2만여명을 집결시킨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를 갖고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계 안팎에는 21세기 들어서도 “열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20살을 갓 넘었던 때에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태’를 증오만 하기보다는 대안을 고민하고 실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열사 주변의 평가이다.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에 ‘바보회’라는 재단사 모임을 만들었다. 바보회 활동지침을 보면 회장이었던 열사가 대안을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활동의 최우선 지침으로 ‘평화시장 일대의 3만여명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근로기준법> 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는 것이 당분간의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돈 많은 독지가를 찾아내 5000만원 정도 투자하도록 하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만들기로 한다’는 것이 지침에 들어가 있다.
직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일할 맛나는 직장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하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할 맛나는 직장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IMF 이후 ‘인원감축 위주의 구조조정’ 때문에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노동자들이 크게 늘었다.
더구나 규모로는 중소영세사업장, 고용형태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난 3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소장은 ‘전태일 열사 30주기 학술심포지움’에서 “열사의 죽음은 노동조합운동이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기구로만 존재하고 있었고, 정작 보호 받아야할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를 소외시켜 왔음을 폭로했다”고 했는데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이 주도하는 지금의 노조운동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소영세사업장노조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주변부에 속해 있다. 양대 노총 모두 ‘비정규직 권리 보호’를 내걸고 있지만 이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한 지는 2년도 안된다.
통계청의 ‘사업체 기초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98년 현재 10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취업자의 43.95%(545만7554명)에 달했다. 이들은 IMF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
실직한 지 1년이 안된 전직실업자의 62.5%(98년 현재)가 종업원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 노동자였다. 노동자 3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체에서 실직한 사람은 5.3%에 불과했다.
실직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재고용돼 상대적 박탈감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4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전면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했던 3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대안을 고민했던 사실을 곰곰이 되씹어 볼 때이다.
전태일 열사가 걸어온 길
1948년 8월 26일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의 장남으로 대구 출생 / 1954년(6세) 모든 가족 서울로 올라옴 / 1956년(8세)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 편입 / 1961년 5월(13세) 첫 번째 가출 / 1963년 5월(15세)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 1963년 겨울 학교 중퇴 후 동생 태삼 데리고 두 번째 가출 / 1965년 가을(17세)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 1966년 10월(18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 / 1967년 2월(19세) 재단사가 되면서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됨 / 1969년 6월(21세)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 회장으로 선출됨 / 1969년 8월∼9월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 300매 인쇄 ‘바보회’에서 설문지 돌렸다가 해고 / 1970년 9월(22세) 왕성사 재단사로 취직, 언론사에 평화시장 근로실태 알림, 삼동친목회를 다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 1970년 10월 6일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 / 1970년 10월 7일 ‘골방에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평화시장 기사특보가 경향신문에 남 /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 다락방 철폐 등 7개항의 요구서 제출 / 1970년 10월 20일 노동청 앞에서 데모하려고 했으나 국정감사를 앞두고 근로감독관이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데모 계획을 며칠만 미뤄달라고 해 중단함 /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 1970년 11월 7일 평화시장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았으나 지켜지지 않음 /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 후 분신
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근로기준법>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사업회’는 이날 오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30주기 추도식을 열고 열사의 뜻을 기렸다. 민주노총은 전날 서울 대학로에서 노동자 시민 학생 등 2만여명을 집결시킨 가운데 전국노동자대회를 갖고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계 안팎에는 21세기 들어서도 “열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외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20살을 갓 넘었던 때에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태’를 증오만 하기보다는 대안을 고민하고 실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열사 주변의 평가이다.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에 ‘바보회’라는 재단사 모임을 만들었다. 바보회 활동지침을 보면 회장이었던 열사가 대안을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활동의 최우선 지침으로 ‘평화시장 일대의 3만여명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근로기준법> 대로 준수되도록 투쟁하는 것이 당분간의 목표’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돈 많은 독지가를 찾아내 5000만원 정도 투자하도록 하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만들기로 한다’는 것이 지침에 들어가 있다.
직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일할 맛나는 직장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있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하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할 맛나는 직장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IMF 이후 ‘인원감축 위주의 구조조정’ 때문에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노동자들이 크게 늘었다.
더구나 규모로는 중소영세사업장, 고용형태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난 3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소장은 ‘전태일 열사 30주기 학술심포지움’에서 “열사의 죽음은 노동조합운동이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기구로만 존재하고 있었고, 정작 보호 받아야할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를 소외시켜 왔음을 폭로했다”고 했는데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이 주도하는 지금의 노조운동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소영세사업장노조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주변부에 속해 있다. 양대 노총 모두 ‘비정규직 권리 보호’를 내걸고 있지만 이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한 지는 2년도 안된다.
통계청의 ‘사업체 기초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98년 현재 10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취업자의 43.95%(545만7554명)에 달했다. 이들은 IMF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
실직한 지 1년이 안된 전직실업자의 62.5%(98년 현재)가 종업원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 노동자였다. 노동자 3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체에서 실직한 사람은 5.3%에 불과했다.
실직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재고용돼 상대적 박탈감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4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전면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했던 3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대안을 고민했던 사실을 곰곰이 되씹어 볼 때이다.
전태일 열사가 걸어온 길
1948년 8월 26일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의 장남으로 대구 출생 / 1954년(6세) 모든 가족 서울로 올라옴 / 1956년(8세)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 편입 / 1961년 5월(13세) 첫 번째 가출 / 1963년 5월(15세)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 1963년 겨울 학교 중퇴 후 동생 태삼 데리고 두 번째 가출 / 1965년 가을(17세)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 1966년 10월(18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 / 1967년 2월(19세) 재단사가 되면서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알게 됨 / 1969년 6월(21세)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 회장으로 선출됨 / 1969년 8월∼9월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 300매 인쇄 ‘바보회’에서 설문지 돌렸다가 해고 / 1970년 9월(22세) 왕성사 재단사로 취직, 언론사에 평화시장 근로실태 알림, 삼동친목회를 다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 1970년 10월 6일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 / 1970년 10월 7일 ‘골방에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평화시장 기사특보가 경향신문에 남 /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 다락방 철폐 등 7개항의 요구서 제출 / 1970년 10월 20일 노동청 앞에서 데모하려고 했으나 국정감사를 앞두고 근로감독관이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데모 계획을 며칠만 미뤄달라고 해 중단함 /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 1970년 11월 7일 평화시장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았으나 지켜지지 않음 /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 후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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