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률 교수의 한국정치 클리닉> 노풍(盧風)의 정치사회학

지역내일 2002-03-27 (수정 2002-03-28 오후 3:02:40)
이회창 총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음 대통령이 된 듯이 행동해 왔다. 그 측근들도 이미 권력을 다 잡은 듯한 착각에 빠져 지내 왔다. 여론조사 때마다 늘 이 총재가 이기는 것으로 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갑갑해 하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자신과 당에 문제가 없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힘들게 고치거나 변화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DJ정부의 각종 비리와 게이트만 물고 늘어져도 정권은 떼논당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이인제 후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회창 총재와의 가상대결에서는 늘 패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그래도 여권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 왔다. 일단 여당 후보가 되어 선거전에 뛰어들면 해볼만 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미 여당 후보가 다 된 것처럼 생각한 이인제 후보 역시 유권자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기존 정치판에 대해 왜 분노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당내 실세와 손잡고 조직표만 잘 관리하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세론에 취해 지내온 것이 이회창 총재와 이인제 후보의 가장 큰 문제였다. 너무 일찍 기득권에 안주해 있으면서 민심의 밑바닥 흐름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미 대통령이 다된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부한 계산법에 근거한 착각이었다.
그 낡은 계산법은 기존 정치권에 절망하는 부동층도 결국 이회창과 이인제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제했다. 유권자들은 좋든 싫든 지역연고의 후보나 정당에게로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내키지 않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도, 유권자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 직전이었음을 이회창 총재와 이인제 후보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두 정치인이 미처 읽지 못했던 밑바닥 민심이 지금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계기는 한국 정치사상 처음 실시되고 있는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로 마련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도 위대한 실천으로 담겨질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위대한 실천은 이번에도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다름아닌 지역감정과의 결별 선언이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자포자기해온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위대한 선택에 동참하는 국민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그 결단과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 척박한 정치판에 희망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정략과 협잡이 판치는 구시대 정치관행도 심판대에 올랐다. 검은 돈과 줄세우기를 정치판의 숙명으로 알았던 낡은 사고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우리도 소신과 원칙이 중시되고, 정책으로 경쟁하는 선진 정치문화를 일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짓눌려 있던 이성과 자존심과 용기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새 정치가 꿈이 아닌 현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노풍(盧風)에 담긴 국민의 여망인 것이다. 낡은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요, 새 정치를 향한 국민적 결단인 것이다. 거품이나 광기 혹은 음모로 치부될 수 없는 구조적 배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맞은 정치혁신의 계기가 지금 좌초 위기에 처해 있다. 소위 음모론이 국민적 결단을 비웃고 있으며, 대전 충남 경선에서는 노골적인 지역주의바람이 휘몰아쳤다. 정치혁신의 기폭제 구실을 해온 국민경선참여제도의 운명도 풍전등화다. 막 시작된 지역감정 청산과 정치혁신 국민행동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고비와 위기를 넘겨야 할지 모른다. 수십년 묵은 지역감정과 패거리 정치관행, 그리고 그에 기생해온 부도덕한 기득권이 순순히 퇴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 누구를 후보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기강과 국운이 걸린 문제다. 어떤 어려움도 헤치고 소중한 정치혁신의 불꽃을 이어가는 국민적 지혜가 필요한 때다. 2002년을 사는 한국민의 역사적 책무인 것이다.

/ 대구대 교수·사회학 한국정치법학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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