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없이 높고 맑은 5월의 하늘을 보며 우리의 청소년들이 저 푸른 하늘처럼 맑고 높은 꿈을 끝없이 훨훨 펼치기를 기대하면서 ‘국가의 장래를 알려면 그 나라의 청소년을 보라’는 명제를 되 뇌이게 된다.
어느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의 예를 보면 경찰청이 전국의 중·고교생 8263명을 상대로 지난 3월 조사한 내용 중 대상 학생의 35.8%가 학교 폭력이 매우 심각하거나 심각한 편이라고 응답했으며 또 11.5%가 지난 1년간 학교 폭력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이다.
사회생활이 복잡해지고 공동체 의식에 앞서 이기주의적 사고나 행동이 매우 심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학생의 피해 상황에도 많은 우리 이웃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불감증 증후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또 아이들(청소년)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는 보편화된 인식 수준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교 폭력을 청소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한 과정과 동일시하는 사고 속에 인명경시의 실제 상황은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학교는 학교이다.’ 특히 초·중등학교는 또래 친구나 비슷한 류의 친구들이 모여 뒹굴고 달리기도 하고 교과서를 중요 도구로 하여 토론하고 우정을 키우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력 경쟁을 중요 활동으로 삼는 곳이다. 이런 일들을 ‘싸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착각을 하거나 심지어 폭력 상황을 학습 활동의 한 장면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느슨한 생각들이 학교 폭력을 묵인하고 증폭시키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악을 악으로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진단이다.
‘학교 폭력’이 발생, 확산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교가 제 기능을 충분히 못하고 있는데 있다. 대부분의 가정이 사교육비로 인해 생활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목을 메고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지나치게 과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학교의 교육적 기능 약화와 관련이 된다.
자녀에 대한 학부모 개개인적 기대차, 입시의 문제, 학맥, 인맥 등이 개인의 능력보다 쟁점이 되는 사회적 풍토, 학교 위상 저하, 세대간의 문화 격차 등 다변 요인을 학교가 모두 감싸 안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사회 변화에 따른 문화 충돌 현상으로만 돌린다면 학교의 존재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사가 주축이 되고 학부모나 지역사회가 학생 지도에 정열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교재나 교수 기기가 개발, 보급이 되어도 이것을 현장에 적용하는 1차 책임은 교사의 몫이다. 고급 승용차도 운전자가 제 역할을 못한다면 고급차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너무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느낌을 근래에 더욱 갖게 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해도 학교 교육보다 과외 학습이 더욱 강화(?)되고 개개인의 적성에 따른 수월성 신장보다 소수 학생의 우월적 지위 성취가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풍토에서 학교 교육 기능을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가 교육의 주체라는 확고한 인식의 확산과 주체적 행동을 강화하는 일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과 실천 노력이 실제화 되지 않는다면 학교가 제기능을 높이는 것은 연목구어이다.
학교 폭력 관리 학원(과외)을 세울 수는 없지 않는가.
“미국에서 좋은 학교는 숙제를 많이 내주고 시험을 자주 보는 학교입니다. 부시 대통령 취임 후 중학교 학력 고사를 부활시키고 엄격한 교육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 공부 좋아하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자 하는 게 결국 그 아이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재미교포 학부모와의 대담을 어느 기자가 옮겨 놓은 글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우리 교육 현장의 의미를 새겨 보는 5월이 되었으면 한다.
이광욱 안동교육청 교육장
어느 일간지에 게재된 기사의 예를 보면 경찰청이 전국의 중·고교생 8263명을 상대로 지난 3월 조사한 내용 중 대상 학생의 35.8%가 학교 폭력이 매우 심각하거나 심각한 편이라고 응답했으며 또 11.5%가 지난 1년간 학교 폭력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이다.
사회생활이 복잡해지고 공동체 의식에 앞서 이기주의적 사고나 행동이 매우 심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학생의 피해 상황에도 많은 우리 이웃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불감증 증후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또 아이들(청소년)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는 보편화된 인식 수준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교 폭력을 청소년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한 과정과 동일시하는 사고 속에 인명경시의 실제 상황은 심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학교는 학교이다.’ 특히 초·중등학교는 또래 친구나 비슷한 류의 친구들이 모여 뒹굴고 달리기도 하고 교과서를 중요 도구로 하여 토론하고 우정을 키우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력 경쟁을 중요 활동으로 삼는 곳이다. 이런 일들을 ‘싸우면서 성장하는 장소’로 착각을 하거나 심지어 폭력 상황을 학습 활동의 한 장면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느슨한 생각들이 학교 폭력을 묵인하고 증폭시키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악을 악으로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진단이다.
‘학교 폭력’이 발생, 확산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교가 제 기능을 충분히 못하고 있는데 있다. 대부분의 가정이 사교육비로 인해 생활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목을 메고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지나치게 과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학교의 교육적 기능 약화와 관련이 된다.
자녀에 대한 학부모 개개인적 기대차, 입시의 문제, 학맥, 인맥 등이 개인의 능력보다 쟁점이 되는 사회적 풍토, 학교 위상 저하, 세대간의 문화 격차 등 다변 요인을 학교가 모두 감싸 안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사회 변화에 따른 문화 충돌 현상으로만 돌린다면 학교의 존재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학교는 교사가 주축이 되고 학부모나 지역사회가 학생 지도에 정열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교재나 교수 기기가 개발, 보급이 되어도 이것을 현장에 적용하는 1차 책임은 교사의 몫이다. 고급 승용차도 운전자가 제 역할을 못한다면 고급차의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너무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느낌을 근래에 더욱 갖게 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해도 학교 교육보다 과외 학습이 더욱 강화(?)되고 개개인의 적성에 따른 수월성 신장보다 소수 학생의 우월적 지위 성취가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풍토에서 학교 교육 기능을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가 교육의 주체라는 확고한 인식의 확산과 주체적 행동을 강화하는 일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과 실천 노력이 실제화 되지 않는다면 학교가 제기능을 높이는 것은 연목구어이다.
학교 폭력 관리 학원(과외)을 세울 수는 없지 않는가.
“미국에서 좋은 학교는 숙제를 많이 내주고 시험을 자주 보는 학교입니다. 부시 대통령 취임 후 중학교 학력 고사를 부활시키고 엄격한 교육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 공부 좋아하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자 하는 게 결국 그 아이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재미교포 학부모와의 대담을 어느 기자가 옮겨 놓은 글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우리 교육 현장의 의미를 새겨 보는 5월이 되었으면 한다.
이광욱 안동교육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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