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아파트군을 비껴나 송포초등학교 옆으로 난 한적한 산길을 10여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가좌리 교회’. 우리 머릿속에 담긴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고 찾다가는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아주 작고 소박한 모습의 교회다.
이 작은 교회의 김창섭 목사도 작은 체구로 동안의 목사. 하지만 김 목사가 지닌 마음넓이는 누구보다 넓다는 것을 인근 주민뿐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이제 다 안다.
6년 전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이 곳에 들어와 신앙인으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하리라는 소명하나로 어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살핀다거나 좋은 일을 한다고 매스컴을 타는 것이 정말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고 털어놓은 김 목사는 자신의 힘으로 누구를 보살피거나 도와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손사레를 친다. 다만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여력이 있다면 나누는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 김 목사의 말이다.
현재 6∼7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 곳은 2평 남짓 방 하나에 2인이 함께 생활하며 부부의 경우 한 방을 쓰고 있다. 한 달 전기료 명목으로 1만원 정도 받는 것이 이들에게 받는 것 전부. 숙식은 식문화의 차이로 각자 해결하고 있다.
많을 때는 10명까지 이 곳에 머물고 있으며 몽골 이란 스리랑카 러시아 카자흐스탄 필리핀 베트남 등 20여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곳을 거쳐갔다.
김 목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공학박사를 꿈꾸며 패기만만하던 27살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 때 좌절 속에서 우연히 기독교신앙과 만나면서 다시 살게 된 제2의 인생을 남을 위한 봉사로 살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생활은 이 세상의 제일 힘든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면 그 일에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믿음하나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김 목사도 인간이기에 어렵고 힘들 때도 많다.
“한 번 도움을 주긴 쉽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김 목사는 대부분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신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병이 나거나 사고로 다쳤을 때 안타깝다고 한다. 다행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 손길이 많아 일산복음병원이나 일산 백병원, 한의원 등에서 실비로 치료해주기도 하는데다 근처주민들이 결코 넉넉한 이들이 아님에도 십시일반 치료비를 보태는 손길이 있어 세상살이의 따뜻함을 느낀다고.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일자리를 얻어주느라 김 목사의 낡은 승합차는 쉴새없이 달린다.
때로는 사고를 치고 말없이 도망가는 외국인들 때문에 김 목사가 고스란히 곤욕을 치르는 일도 있지만 우리가 예전에 진 빚을 갚는게 아니냐고 넉넉하게 웃는다.
“우리가 이전에 서독파견 광부 간호사로 일할 때, 중동지역이나 월남에서 근로자생활을 할 때를 잊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가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라는 김 목사의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둘 만하다. “가진게 많다고 남을 더 많이 돕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록 제게 가진 것은 너무나 적지만 그래도 나누어 줄 것이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라는 김 목사의 앞으로 희망은 사람을 키우는 일. 그동안 교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유치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중학생 등을 가르치는 등 국가경쟁력의 으뜸인 사람 키우기에 열성을 쏟았지만 건강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잠시 미루고 있는 일을 다시 체계적으로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영어회화공부에 열중하고 있다는 김 목사, 빛과 소금 같은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923-1469)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이 작은 교회의 김창섭 목사도 작은 체구로 동안의 목사. 하지만 김 목사가 지닌 마음넓이는 누구보다 넓다는 것을 인근 주민뿐 아니라 알만한 사람은 이제 다 안다.
6년 전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이 곳에 들어와 신앙인으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하리라는 소명하나로 어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살핀다거나 좋은 일을 한다고 매스컴을 타는 것이 정말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고 털어놓은 김 목사는 자신의 힘으로 누구를 보살피거나 도와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손사레를 친다. 다만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여력이 있다면 나누는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 김 목사의 말이다.
현재 6∼7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이 곳은 2평 남짓 방 하나에 2인이 함께 생활하며 부부의 경우 한 방을 쓰고 있다. 한 달 전기료 명목으로 1만원 정도 받는 것이 이들에게 받는 것 전부. 숙식은 식문화의 차이로 각자 해결하고 있다.
많을 때는 10명까지 이 곳에 머물고 있으며 몽골 이란 스리랑카 러시아 카자흐스탄 필리핀 베트남 등 20여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곳을 거쳐갔다.
김 목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공학박사를 꿈꾸며 패기만만하던 27살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 때 좌절 속에서 우연히 기독교신앙과 만나면서 다시 살게 된 제2의 인생을 남을 위한 봉사로 살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생활은 이 세상의 제일 힘든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면 그 일에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믿음하나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김 목사도 인간이기에 어렵고 힘들 때도 많다.
“한 번 도움을 주긴 쉽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김 목사는 대부분 불법체류자들이기 때문에 신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병이 나거나 사고로 다쳤을 때 안타깝다고 한다. 다행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 손길이 많아 일산복음병원이나 일산 백병원, 한의원 등에서 실비로 치료해주기도 하는데다 근처주민들이 결코 넉넉한 이들이 아님에도 십시일반 치료비를 보태는 손길이 있어 세상살이의 따뜻함을 느낀다고.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일자리를 얻어주느라 김 목사의 낡은 승합차는 쉴새없이 달린다.
때로는 사고를 치고 말없이 도망가는 외국인들 때문에 김 목사가 고스란히 곤욕을 치르는 일도 있지만 우리가 예전에 진 빚을 갚는게 아니냐고 넉넉하게 웃는다.
“우리가 이전에 서독파견 광부 간호사로 일할 때, 중동지역이나 월남에서 근로자생활을 할 때를 잊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가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라는 김 목사의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둘 만하다. “가진게 많다고 남을 더 많이 돕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비록 제게 가진 것은 너무나 적지만 그래도 나누어 줄 것이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라는 김 목사의 앞으로 희망은 사람을 키우는 일. 그동안 교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유치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과 중학생 등을 가르치는 등 국가경쟁력의 으뜸인 사람 키우기에 열성을 쏟았지만 건강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잠시 미루고 있는 일을 다시 체계적으로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영어회화공부에 열중하고 있다는 김 목사, 빛과 소금 같은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923-1469)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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