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의원 방북기2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 일정은 삼일째 점심식사 뒤 전해 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북측 안내원이 김 위원장이 저녁 7시에 숙소를 찾아온다면서 구체적인 면담 일정을 알려줬다.
단독 면담은 백화원초대소내 별도 회의실에서 한시간 동안 진행됐다. 면담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면담 말미에 김 위원장이 “베이징으로 가면 특별한 스케줄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일부러 돌아갈 필요 없이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솔직히 김 위원장의 제의가 반가웠다. ‘나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가식 없이 솔직하게 얘기했고, 나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첫 만남이라고 하지만 (선친들간에) 과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모든 것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이산가족 정례 면회소 설치와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국군의 생사확인, 금강산댐 남북공동조사, 북한 축구국가대표단 초청 등을 제의했고, 김 위원장은 전부 흔쾌히 수용했다. 김 위원장은 ‘면회소 설치장소는 금강산 관광길의 적당한 곳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 위원장은 우리 정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의 지지도 변화 등에 대해 내가 말할 필요 없이 잘 알고 있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방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적절한 시기에 하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시기는 우리가 강요할 것이 아니라 김 위원장의 판단에 맡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다.
면담 결과 발표형식을 놓고 내가 “어떻게 정리해서 알리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김 위원장은 “박 위원장이 알아서 하시라”고 선뜻 나에게 일임했다.
김 위원장은 나와의 면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그 자리에서 지시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선친간에 얽힌 비사를 화제로 올렸다. 7.4 공동성명발표 직전 남북간 교섭과정을 전하며 선친을 높게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기 전에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중국 푸둥을 본 소감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김 위원장은 “많이 달라졌다. 중국이 크게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북한 방문에서 체감한 것은 북한이 남북한 철도연결을 통해 한반도를 국제적인 물류기지화하는 데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등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귀환 당일인 14일에는 판문점을 통과해 기자들을 만날 것에 대비,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평양에서 개성을 지나 판문점으로 왔는데, 평양-개성간 도로는 일직선으로 돼 있었다. 지도로 말하면 일직선으로 죽 그었다고 할 정도로 도로가 반듯했다. 도로 양편에는 자주빛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있었다.
시간이 남아 한시간 가까이 개성 유적지를 찾는 일정을 가졌다. 사진으로만 봐온 선죽교를 직접 보니 인상이 깊었다. 지금은 고려 박물관이 돼 있는 성균관은 그 입구에 몇백년된 느티나무가 몇그루 서 있었다. 장정 몇 사람이 손을 맞잡고 둘러싸야 잡힐 정도의 큰 나무로 유구한 역사가 느껴졌다.
판문점을 넘어 귀환할 때 남북이 이렇게 가까운 데 먼 길을 둘러서 오고 있구나, 빨리 남북한 주민이 이 길을 이용해서 왕래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내가 북한 방문을 마친 뒤 일부에서는 ‘아웅산 테러, 문세광 사건 등에 대해 북한의 사과를 받지 않고 김 위원장 말만 듣고 왔다’고 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나의 방북은 사과 받으러 간 것이 아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을 대신해서 말하기 위해 간 것이고, 남북한 공존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간 것이다. 이번 방북을 통해 나의 이같은 바람이 조금이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3박4일의 북한 방문기간 가슴이 찡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의 현실이 서글펐다. 남북한이 같이 잘사는 날이 오길 손꼽아 기대해 본다.(끝)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 일정은 삼일째 점심식사 뒤 전해 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북측 안내원이 김 위원장이 저녁 7시에 숙소를 찾아온다면서 구체적인 면담 일정을 알려줬다.
단독 면담은 백화원초대소내 별도 회의실에서 한시간 동안 진행됐다. 면담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면담 말미에 김 위원장이 “베이징으로 가면 특별한 스케줄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일부러 돌아갈 필요 없이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솔직히 김 위원장의 제의가 반가웠다. ‘나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쓰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가식 없이 솔직하게 얘기했고, 나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첫 만남이라고 하지만 (선친들간에) 과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모든 것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이산가족 정례 면회소 설치와 6.25 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국군의 생사확인, 금강산댐 남북공동조사, 북한 축구국가대표단 초청 등을 제의했고, 김 위원장은 전부 흔쾌히 수용했다. 김 위원장은 ‘면회소 설치장소는 금강산 관광길의 적당한 곳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김 위원장은 우리 정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의 지지도 변화 등에 대해 내가 말할 필요 없이 잘 알고 있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방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적절한 시기에 하겠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시기는 우리가 강요할 것이 아니라 김 위원장의 판단에 맡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다.
면담 결과 발표형식을 놓고 내가 “어떻게 정리해서 알리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김 위원장은 “박 위원장이 알아서 하시라”고 선뜻 나에게 일임했다.
김 위원장은 나와의 면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그 자리에서 지시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선친간에 얽힌 비사를 화제로 올렸다. 7.4 공동성명발표 직전 남북간 교섭과정을 전하며 선친을 높게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기 전에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중국 푸둥을 본 소감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더니 김 위원장은 “많이 달라졌다. 중국이 크게 발전했다”고 평가했다.
북한 방문에서 체감한 것은 북한이 남북한 철도연결을 통해 한반도를 국제적인 물류기지화하는 데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등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귀환 당일인 14일에는 판문점을 통과해 기자들을 만날 것에 대비,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평양에서 개성을 지나 판문점으로 왔는데, 평양-개성간 도로는 일직선으로 돼 있었다. 지도로 말하면 일직선으로 죽 그었다고 할 정도로 도로가 반듯했다. 도로 양편에는 자주빛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있었다.
시간이 남아 한시간 가까이 개성 유적지를 찾는 일정을 가졌다. 사진으로만 봐온 선죽교를 직접 보니 인상이 깊었다. 지금은 고려 박물관이 돼 있는 성균관은 그 입구에 몇백년된 느티나무가 몇그루 서 있었다. 장정 몇 사람이 손을 맞잡고 둘러싸야 잡힐 정도의 큰 나무로 유구한 역사가 느껴졌다.
판문점을 넘어 귀환할 때 남북이 이렇게 가까운 데 먼 길을 둘러서 오고 있구나, 빨리 남북한 주민이 이 길을 이용해서 왕래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내가 북한 방문을 마친 뒤 일부에서는 ‘아웅산 테러, 문세광 사건 등에 대해 북한의 사과를 받지 않고 김 위원장 말만 듣고 왔다’고 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나의 방북은 사과 받으러 간 것이 아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을 대신해서 말하기 위해 간 것이고, 남북한 공존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간 것이다. 이번 방북을 통해 나의 이같은 바람이 조금이라도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3박4일의 북한 방문기간 가슴이 찡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의 현실이 서글펐다. 남북한이 같이 잘사는 날이 오길 손꼽아 기대해 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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