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주엽동에 위치한 발산중학교(교장 최성윤)는 지난 93년 6월 개교한 이래 첫째 덕성함양, 둘째 기초학력 기르기 및 자기주도 학습능력 향상, 셋째 고양시의 빛나는 명문학교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결과물의 하나인 태권도부에서는 짧은 연륜과 선수층이 두껍지 않음에도 올해 알찬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화제.
태권도의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동쪽 만주주변 한민족의 부족국가에서는 영고 무천 동맹 등으로 불리운 제례에서 하늘을 숭상하는 가무, 유희오락을 통해 부족 단합과 많은 수확을 기원했다. 이런 큰 잔치 중의 가무, 유희는 자연스럽게 경쟁 의식을 갖게 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전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처럼 경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부족의 방어와 세력확대를 위해서는 전투능력향상을 도모해야 했으며 자연스럽게 숭천제례의 신체활동은 투기를 중심으로 경기화 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태권도는 이런 가운데 한민족 고유의 투기형태로 생성되었다.
하지만 국운 쇠퇴와 더불어 무인들의 몰락은 군대의 해체 등으로 가속화되었고 일제는 강압적인 무력침략을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써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욕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8·15 해방 후 잊혀진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 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의 스포츠제전인 올림픽 무대에서까지 각광받고 있는 태권도 경기는 바로 25년 전인 1963년의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경기규칙과 보호용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의 민족정기를 담은 태권도부가 발산중학교에서 결성된 것은 지난 94년 4월, 하지만 대내외적인 사정으로 97년 다시 재 결성하게 되었다. 간형래 감독과 홍문주 코치, 그리고 15명의 선수가 발산중학교 태권도부의 정예멤버들. 동네마다 태권도체육관이 몇 개씩 들어서 있고 어릴 때 조기교육으로 태권도가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지만 사실상 태권도를 꾸준히 배우는 학생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고양시내 초등학교 체육특기부에 태권도부가 없는 것도 선수수급에 문제점이라고 간형래 감독은 말한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15명의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올해 이 학교 2학년 김정란 학생이 전국여성부장관기에서 헤비급 1위 금메달을 획득하고 손준 학생이 전국중고연맹회장기배 헤비급 2위에 입상하는 등 쾌거를 올렸다.
15명의 선수 중 여학생은 3명.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태권도특기생들 3명이 이 팀에 합류하여 방과후 3시간씩 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의 진두지휘를 맡고 있는 홍문주 코치는 부산 동아대학교 졸업 후 실업팀 선수생활을 거쳐 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 코치다. 홍 코치의 탁월한 지도와 선수들의 단결, 선후배간의 조화로 발산중학교 태권도부의 미래는 탄탄하다.
이는 태권도부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아끼지 않는 최성윤 교장의 열의와 불모지나 다름없는 훈련환경개선과 선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의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태권도부 학생들은 운동뿐 아니라 학업에도 그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보여주어 이런 주위의 성원에 보답하고 있다.
태권도 국가대표, 이들이 꿈꾸는 최종목표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의 꿈나무들이다.
그 결과물의 하나인 태권도부에서는 짧은 연륜과 선수층이 두껍지 않음에도 올해 알찬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화제.
태권도의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동쪽 만주주변 한민족의 부족국가에서는 영고 무천 동맹 등으로 불리운 제례에서 하늘을 숭상하는 가무, 유희오락을 통해 부족 단합과 많은 수확을 기원했다. 이런 큰 잔치 중의 가무, 유희는 자연스럽게 경쟁 의식을 갖게 되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전제례행사인 올림피아 제전처럼 경기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부족의 방어와 세력확대를 위해서는 전투능력향상을 도모해야 했으며 자연스럽게 숭천제례의 신체활동은 투기를 중심으로 경기화 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태권도는 이런 가운데 한민족 고유의 투기형태로 생성되었다.
하지만 국운 쇠퇴와 더불어 무인들의 몰락은 군대의 해체 등으로 가속화되었고 일제는 강압적인 무력침략을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의 한민족 탄압이 강화되기 시작하고 항쟁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백성들의 무예수련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독립군, 광복군 등 항일조직의 심신 훈련방법으로써나 개인적인 무예 전승 의욕에 따라 태권도(태견)의 명맥은 미미하지만 민족의 숨결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8·15 해방 후 잊혀진 우리의 태권도를 되찾자는 뜻있는 이들이 모여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점차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게 되어 드디어 1961년 9월 16일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27번째 가맹단체로 가입되어 1963년 10월 9일 전주에서 개최된 제 44회 전국체전에 태권도가 공식경기로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의 스포츠제전인 올림픽 무대에서까지 각광받고 있는 태권도 경기는 바로 25년 전인 1963년의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경기규칙과 보호용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의 민족정기를 담은 태권도부가 발산중학교에서 결성된 것은 지난 94년 4월, 하지만 대내외적인 사정으로 97년 다시 재 결성하게 되었다. 간형래 감독과 홍문주 코치, 그리고 15명의 선수가 발산중학교 태권도부의 정예멤버들. 동네마다 태권도체육관이 몇 개씩 들어서 있고 어릴 때 조기교육으로 태권도가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지만 사실상 태권도를 꾸준히 배우는 학생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고양시내 초등학교 체육특기부에 태권도부가 없는 것도 선수수급에 문제점이라고 간형래 감독은 말한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15명의 얇은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올해 이 학교 2학년 김정란 학생이 전국여성부장관기에서 헤비급 1위 금메달을 획득하고 손준 학생이 전국중고연맹회장기배 헤비급 2위에 입상하는 등 쾌거를 올렸다.
15명의 선수 중 여학생은 3명.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태권도특기생들 3명이 이 팀에 합류하여 방과후 3시간씩 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의 진두지휘를 맡고 있는 홍문주 코치는 부산 동아대학교 졸업 후 실업팀 선수생활을 거쳐 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 코치다. 홍 코치의 탁월한 지도와 선수들의 단결, 선후배간의 조화로 발산중학교 태권도부의 미래는 탄탄하다.
이는 태권도부에 대해 전폭적 지지를 아끼지 않는 최성윤 교장의 열의와 불모지나 다름없는 훈련환경개선과 선수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의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태권도부 학생들은 운동뿐 아니라 학업에도 그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 진정한 ‘스포츠정신’을 보여주어 이런 주위의 성원에 보답하고 있다.
태권도 국가대표, 이들이 꿈꾸는 최종목표지만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의 꿈나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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