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더위를 식히기 위해 시원한 곳을 찾아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가까운 곳을 찾는다. 길을 가는 김포 시민 누구에게 “가까운 곳 어디를 자주 가세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장릉’을 말한다.
장릉산에 위치한 장릉은 울창한 숲 덕분에 김포시민의 공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휴일이면 700~800여명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한 두번쯤은 정자각까지 올라가 한번 둘러보고 먼발치 봉분이 있는 왕릉을 보고는 조금은 실망한 채 그냥 나무 그늘을 찾아 점심만 먹고 놀다 오곤 한다. 그 다음 갈 때는 아예 시원한 나무 그늘로 가서 있다가 오기 일쑤이다. 왕릉의 참모습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환경생태체험지도자 교육과정의 하나인 ‘장릉의 역사문화’에 참여해 역사학자 한동민 교수(중앙대 사학과)의 현장 강의로 장릉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홍살문과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더해 줘
장릉(章陵)은 사적 제202호로서 조선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구(具)씨의 능이 자리잡고 있다. 장릉이 있는 장릉산은 원래 북성산이라 불리어 왔는데 장릉을 이 곳에 마련하면서부터 장릉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왕릉의 시작을 알리는 홍살문은 우주목을 상징하는 솟대처럼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 칠을 한 문으로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린다. 30자 이상의 둥그런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네모난 돌로 된 배위(拜位)가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문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다. 참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오른쪽 부분은 한 단을 낮게 만들었다. 이는 혼령이 마중 나오는 길 왼쪽 신로(神路)와 오른쪽 인로(人潞)를 분리해 놓은 것이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 박석(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종자각(丁字閣)은 왕릉이나 원의 앞에 있는 제전으로 건물형태가 ‘장정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각에는 양쪽에 계단이 있는데 동쪽으로 난 계단은 올라가는 계단, 서쪽으로 난 계단은 내려오는 계단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를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왼쪽은 신령이 올라가는 계단이고 오른쪽 계단은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한다. 정자각 내에는 왕의 위패를 조각해 두었으며 제사 때 이 곳에 제물을 진열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 동쪽에는 능의 비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는데 비에는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 左)’라고 쓰여 있어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 비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는 심한 경사의 사초지(莎草地)가 있고 대게 울타리로 보호막을 만들어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왕릉의 참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능의 비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능을 만드는데 3~5개월이 걸리고 몇 천명이 동원
사초지를 올라 봉분이 있는 능원으로 오면 장릉은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고 호석을 두른 쌍릉(왕과 왕비의 능으로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조성된 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양쪽엔 관을 쓰고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갑옷에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각각 양쪽에 석마(石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봉분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모습은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밖에 연못 옆 장릉 관리사무소라고 푯말이 있는 곳이 바로 제실이다. 제실은 직무실 겸 숙소로 제를 지낼 때 음식물을 만들거나 제기를 보관하기도 하고 임금들이 와서 제실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곳이다.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본 건물구조, 위치, 모양새 하나 하나에 깊은 의미와 내용이 숨겨져 있어 신비롭기까지 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었다. 대게 능을 만드는 일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고 능역에 동원된 인원만 해도 몇 천인에 달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관람이나 사진촬영 정도로 왕릉의 참모습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아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한 만큼 보인다고 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왕릉의 하나인 장릉을 참모습을 알아 간다면 장릉이 주는 자연적 혜택 이외에 우리지역에 있는 문화유산을 더 애정 있게 바라보고 아이들에게도 역사와 문화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장릉은 김포시청에서 오른쪽으로 풍무동 가는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된다. 매주 월요일에는 휴관하고 어른은 400원, 만 18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984-2897 장릉관리사무소)
최선미 리포터 mongsil0406@hanmail.net
장릉산에 위치한 장릉은 울창한 숲 덕분에 김포시민의 공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휴일이면 700~800여명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한 두번쯤은 정자각까지 올라가 한번 둘러보고 먼발치 봉분이 있는 왕릉을 보고는 조금은 실망한 채 그냥 나무 그늘을 찾아 점심만 먹고 놀다 오곤 한다. 그 다음 갈 때는 아예 시원한 나무 그늘로 가서 있다가 오기 일쑤이다. 왕릉의 참모습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환경생태체험지도자 교육과정의 하나인 ‘장릉의 역사문화’에 참여해 역사학자 한동민 교수(중앙대 사학과)의 현장 강의로 장릉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홍살문과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더해 줘
장릉(章陵)은 사적 제202호로서 조선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 구(具)씨의 능이 자리잡고 있다. 장릉이 있는 장릉산은 원래 북성산이라 불리어 왔는데 장릉을 이 곳에 마련하면서부터 장릉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왕릉의 시작을 알리는 홍살문은 우주목을 상징하는 솟대처럼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 칠을 한 문으로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린다. 30자 이상의 둥그런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네모난 돌로 된 배위(拜位)가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문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다. 참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오른쪽 부분은 한 단을 낮게 만들었다. 이는 혼령이 마중 나오는 길 왼쪽 신로(神路)와 오른쪽 인로(人潞)를 분리해 놓은 것이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 박석(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종자각(丁字閣)은 왕릉이나 원의 앞에 있는 제전으로 건물형태가 ‘장정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각에는 양쪽에 계단이 있는데 동쪽으로 난 계단은 올라가는 계단, 서쪽으로 난 계단은 내려오는 계단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를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왼쪽은 신령이 올라가는 계단이고 오른쪽 계단은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한다. 정자각 내에는 왕의 위패를 조각해 두었으며 제사 때 이 곳에 제물을 진열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 동쪽에는 능의 비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는데 비에는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 左)’라고 쓰여 있어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 비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는 심한 경사의 사초지(莎草地)가 있고 대게 울타리로 보호막을 만들어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왕릉의 참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능의 비라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능을 만드는데 3~5개월이 걸리고 몇 천명이 동원
사초지를 올라 봉분이 있는 능원으로 오면 장릉은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고 호석을 두른 쌍릉(왕과 왕비의 능으로 하나의 곡장 안에 모셔 봉분이 나란히 조성된 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양쪽엔 관을 쓰고 홀을 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갑옷에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각각 양쪽에 석마(石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봉분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모습은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밖에 연못 옆 장릉 관리사무소라고 푯말이 있는 곳이 바로 제실이다. 제실은 직무실 겸 숙소로 제를 지낼 때 음식물을 만들거나 제기를 보관하기도 하고 임금들이 와서 제실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곳이다.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본 건물구조, 위치, 모양새 하나 하나에 깊은 의미와 내용이 숨겨져 있어 신비롭기까지 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를 엿볼 수 있었다. 대게 능을 만드는 일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렸고 능역에 동원된 인원만 해도 몇 천인에 달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관람이나 사진촬영 정도로 왕릉의 참모습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아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한 만큼 보인다고 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왕릉의 하나인 장릉을 참모습을 알아 간다면 장릉이 주는 자연적 혜택 이외에 우리지역에 있는 문화유산을 더 애정 있게 바라보고 아이들에게도 역사와 문화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장릉은 김포시청에서 오른쪽으로 풍무동 가는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된다. 매주 월요일에는 휴관하고 어른은 400원, 만 18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984-2897 장릉관리사무소)
최선미 리포터 mongsil04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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