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준)이 지난달 29일 오후 건강보험회관에서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 초대 총재였던 동농(東農) 김가진선생 서거 80주년을 맞아 창립식겸 이를 기념하는 학술회의를 열었다.
창립식에서는 조문기(75)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동단은 3·1운동으로 포출된 독립열기 속에 조직됐던 독립운동단체였다. 당시 일제 검찰조서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손병희 등 33명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것을 보고 이같이 개인적인 집단으로서는 불가하다, 조선 전민족의 각 계급을 대표한 의사를 발표하여 운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동단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대동단은 조직대상이 되는 사회 각층을 11개단으로 구분했는데, 황족부터 유림 교육 상공 노동 청년 부인 군인 지역에 이르기까지 명실 공히 전체 조선사회 구성원을 모두 포괄하는 독립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대동단의 초대 총재였던 김가진선생은 규장각 검서관 출신으로 1품에까지 오른 대신이었고 외교관으로도 활약한 개화파 인사였다. 대동단 총재를 수락한 이후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서거할 때까지 상해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구한말 고관대작의 망명과 서거 소식은 당시 세계 언론에서 큰 충격으로 보도된 바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대동단의 역사적 의의와 그 기념사업’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한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는 “대동단은 그 역사적 의의에 비해 연구가 부족했다”고 전제하고 “지금까지의 자료와 연구에 의해서도 민족운동사에서 점하고 있는 역사적 위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대동단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라는 점과 함께 그 구성원의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까지 밝혀진 대동단원의 명단은 모두 76명인데, 군인 상공 청년 노동 등의 분야가 망라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또 대동단이 1919년 10월 31일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선정한 민족대표 33인에도 의친왕과 같은 황족을 비롯, 노인 부인 청년 곡물상 무역상 교사 농업 광업종사자 등의 실로 다양한 계급의 인사가 포함돼 있다.
대동단은 회원 전원이 체포되고 36명이 일제에 의해 실형이 선고되는 고초를 겪으면서 국내 조직은 거의 와해되고 상해에 해외 본부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유대를 가지면서 명목을 유지하게 된다.
대동단은 짧지만 굵직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단체로써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이만도 30명이 넘는다.
이날 선출된 조문기 회장은 “기념사업이 자칫하면 특정인물을 위한 기념사업이 될 수 있는데 반해 대동단기념사업은 특정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동단의 이념과 활동을 선양하고 기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그런 점에서 한국 기념사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창립식에서는 조문기(75)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동단은 3·1운동으로 포출된 독립열기 속에 조직됐던 독립운동단체였다. 당시 일제 검찰조서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손병희 등 33명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것을 보고 이같이 개인적인 집단으로서는 불가하다, 조선 전민족의 각 계급을 대표한 의사를 발표하여 운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동단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대동단은 조직대상이 되는 사회 각층을 11개단으로 구분했는데, 황족부터 유림 교육 상공 노동 청년 부인 군인 지역에 이르기까지 명실 공히 전체 조선사회 구성원을 모두 포괄하는 독립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다.
대동단의 초대 총재였던 김가진선생은 규장각 검서관 출신으로 1품에까지 오른 대신이었고 외교관으로도 활약한 개화파 인사였다. 대동단 총재를 수락한 이후 그는 중국으로 망명해 서거할 때까지 상해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구한말 고관대작의 망명과 서거 소식은 당시 세계 언론에서 큰 충격으로 보도된 바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대동단의 역사적 의의와 그 기념사업’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한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는 “대동단은 그 역사적 의의에 비해 연구가 부족했다”고 전제하고 “지금까지의 자료와 연구에 의해서도 민족운동사에서 점하고 있는 역사적 위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이 교수는 “대동단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라는 점과 함께 그 구성원의 다양성으로 인해 더욱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까지 밝혀진 대동단원의 명단은 모두 76명인데, 군인 상공 청년 노동 등의 분야가 망라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또 대동단이 1919년 10월 31일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선정한 민족대표 33인에도 의친왕과 같은 황족을 비롯, 노인 부인 청년 곡물상 무역상 교사 농업 광업종사자 등의 실로 다양한 계급의 인사가 포함돼 있다.
대동단은 회원 전원이 체포되고 36명이 일제에 의해 실형이 선고되는 고초를 겪으면서 국내 조직은 거의 와해되고 상해에 해외 본부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유대를 가지면서 명목을 유지하게 된다.
대동단은 짧지만 굵직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단체로써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이만도 30명이 넘는다.
이날 선출된 조문기 회장은 “기념사업이 자칫하면 특정인물을 위한 기념사업이 될 수 있는데 반해 대동단기념사업은 특정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동단의 이념과 활동을 선양하고 기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그런 점에서 한국 기념사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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